2014. 7. 2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24)
  본문 : 행 2:18-21   

  제목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8.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지금 신약교회의 시작과 함께 베드로 사도가 최초로 설교한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처럼 정식 예배를 통해서 한 설교는 아니지만 이 부분을 베드로의 설교라고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그들이 방언으로 말을 했을 때 그 방언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것에 대하여 바르게 설명하는 대목이지만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을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세 번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설교를 했지만 후일에 베드로전후서의 기록을 통해서 상세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설교의 특징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설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지상사역기간동안을 다 따라다니면서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나 부활하심을 직접 보고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그대로 증언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보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보고 들은 것이 다 성경에서 예언했던 것이여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설교의 패턴이 설교의 원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이런 설교의 패턴을 따르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거나 설교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삶에 실천함으로 간접경험을 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삶 속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그냥 이야기 하거나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과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을 함으로서 설교가 허황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했던 일을 너무나 강조함으로서 그것이 성경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설교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행위가 아무리 선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과 관계가 없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의 목적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어야 그것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잔뜩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선 재미있고 관심이 있어 하는 분야가 다들 있기 때문에 설교의 원칙 같은 것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특별하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들이십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아시는 분들이십니다.
  왜 교회에 다니는지를 확실하게 아시는 분들이십니다.

  아무것이나 다 설교라고 듣고 아멘 하시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바른 설교를 가려서 들을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단에 넘어가지 않고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사와 징조를 베풀리니


  본문 19절-20절에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계속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오순절에 이런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 때문이고 그것은 구약시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것이 이루어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는 성령님께서 오시면 나타나는 특별한 일들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을 꿈을 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오늘날 성령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이이들까지도 장래 일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젊은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이 많은 늙은이들도 꿈을 꾸면서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희망적인 말씀이 아니라 좀 무서운 말씀처럼 보입니다.
  하늘에는 기사가 나타나고 땅에서는 징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피와 불과 연기라고 했습니다.
  또 해가 변하여 어두움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무시무시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날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면 기사와 징조가 보이고 피와 불과 연기가 나오고 해가 변하여 어두움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는 계속 반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현재에 미래에 세상 끝 날에도 있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세상 끝 날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의 중간 중간에 이런 일들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는 전쟁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며 건물들은 불에 타서 무너지고 사람들이 사는 거리에 온통 자욱한 연기가 덮일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쟁을 통해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런 전쟁을 통해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전 오백 여 년경에 아주 이스라엘에 비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전쟁으로 인해서 앗수르에게 바벨론에게 비참하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으며 남은 사람들은 다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그 포로도 잡혀 온 사람들 가운데 남은 자를 구원하셔서 다시 성전을 짓고 나라를 세우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시게 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불러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가 된다면 그 죄 값을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돌리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한 번 비참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에 엄청난 전쟁이 있었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비참하게 패하고 성전도 모든 도시도 불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천둥과 번개와 지진이 있었고 불과 연기는 문자 그대로 도시와 마을, 회당, 그리고 마침내는 성전까지 불에 태워버렸다고 했습니다.
  이 날을 크고 영화로운 주의 날이라고 한 것은 주님께서 심판주가 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크고 영화로우신 모습으로 그들을 징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런 전쟁 통에도 그런 난리 통에도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 때도 적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즉결 심판을 하시지 않으시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큰 소리를 치면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며 그 벌은 아주 비참한 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본문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든지 여자든지
  그 사람이 주인이든지 종이든지
  그 사람이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그 사람이 잘난 자든지 못난 자든지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자든지 악을 행하는 자든지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진짜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고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미리 주님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불러야 합니다.

1)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기들 스스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창세기 4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경건한 후손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그들은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년쯤 살면 죽으니까 당연히 인간이 죽는 줄 알지만 그 때는 1000여년씩이나 살던 시대이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잘 몰랐던 시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인생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함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죄에서 나를 건져주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데 그 이름을 불러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빠서 뭐가 그렇게 급해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이 그 죽음의 절벽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에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들도 만들어 보고 훌륭한 사람을 교주로 세워보기도 하면서 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한 길인데 다른 길이 없는데 대강 적당히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3)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전파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듣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바른 설교를 듣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바르지 못한 엉터리 설교를 듣는 사람은 엉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은 엉터리들이 많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엉터리 설교를 하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다 엉터리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잘살게 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면 100% 다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착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편리하게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들 모으려고 목사가 편한 대로 편집한 것이지 참 설교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살아도 성공하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많아도 세상은 더욱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실수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죄도 지으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노력을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이 오히려 더 나쁜 짓만 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게 합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이 죄악 된 삶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을 믿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다.
  그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4)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많은 시들이 주님의 이름 하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63:4)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86:12)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나의 평생에 주의 이름을 송축하고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주의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내 손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찬양이 없이 이런 감사 없이 이런 감격도 없이 환난 날에 구원만 받으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염치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심판을 면할 수가 없고 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구원을 받고
  크고 작은 심판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일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날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의 위대함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부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