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08)

본문 : 행 1:6-8

제목 :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 특별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믿는 믿음을 다이아몬드와 같이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 즉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하나씩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이아몬드가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라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를 원석으로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믿음을 선물로 받고 난 후의 반응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받고도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중요한 곳에 보관하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서 집안 여기저기 굴러다니게 합니다.

그러다가 방구석에 처박혀서 찾지 못하게 되거나 아이들이 가지고 나가서 구슬치기 하다가 내버리고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아슬아슬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원석이 가공하면 너무나 값비싼 보석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원석을 정성스럽게 잘 가공을 하여 아주 빛난 값비싼 다이아몬드로 만듭니다.

 

그런데 그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사용할까 궁리를 하다가 팔아서 돈으로 집도 사고 땅도 사고 좋은 차도 사서 잘 먹고 잘 살기로 하고 그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행복하게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잘 가공해서 비싸게 팔아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제가 왜 아침부터 이 뻔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두 사람이 다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라는 관점에서 이야기 하면 그것이 정답이지만 그 다이아몬드가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 다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잘 가공해서 비싼 값에 팔아야 하겠지만 믿음은 팔아버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끝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아주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그 믿음을 끝까지 간직을 해서 세상 끝 날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려고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주 빛나게 만들어서 파는 사람보다는 원석 그대로라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잊어버릴까봐 그냥 내버릴까봐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그나마 가지고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이 되는 사람입니까?

원석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까?

이게 뭐지 내버릴까 귀찮네. 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소중함을 알고 열심히 가공은 하고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여차하면 세상의 좋은 것들과 바꾸어버릴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다이아몬드로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시냐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너무나 귀한 것임을 알고 그 믿음을 자꾸 가꾸어나가시고 그 믿음이 아주 빛난 다이아몬드가 되게 하시고 끝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이것만은 간직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잘 할수록 너무나 값진 것이 됩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을 가진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치를 알지 못하고 처박아 두거나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신들이 받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서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여쭈어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너무 답답하셔서 그것은 너희들이 알 바도 아니고 관여할 것도 아니고 너희들에게 준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증인이 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아직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고 엉뚱한 것을 요구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귀와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의 비밀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바른 신앙인이 되어서 바른 길 진리의 길로 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오늘 본문 말씀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였을 때”는 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모이게 했을 그 때와 같은 때를 말합니다.

“여쭈어 이르되”는 우리말로 보면 한번 질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헬라어에서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써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친히 살아나심을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실 때를 말합니다.

이제 바로 곧 승천하시니까 육신으로 대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질문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요 절호의 찬스입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육신의 눈으로 평생 다시는 볼 수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재림을 하시든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직접 뵐 수 있는 마지막 시간들입니다.

 

얼마나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을까요?

이것저것 다 물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세상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 이런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고 아직도 마음은 이 세상의 권력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고 대신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실 것이고 대신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인데 실상은 성령님께서 오시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그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왜 가셔야만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받을 구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 그 이스라엘나라가 독립이 되어서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16:5-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이나 하나님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이 세상일에만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오셔서 무슨 질문을 하고 싶습니까?

예수님께나 성령님께나 안 되면 목사에게 무슨 질문을 하고 싶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어떤 성도가 질문이 있습니다. 하고 손을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해 보라고 했더니 목사님 모세가 신은 신발이 어떤 신발입니까? 구두도 없었을 것이고 고무신도 없었을 것인데 집신일까요 나무로 만든 일본식 게다일까요? 라고 질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성도가 “그거 천국입국 시험에 나오는 문제냐”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를 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여기서 벗으라는 신발이 무슨 신발이냐는 것이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신이었을까요 궁금하기는 저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집신이면 어떻고 게다면 어떻고 고무신이면 어떻습니까?

혹시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괜찮은 질문이 되겠지만 신발의 종류를 묻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중요한 순간에 모여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 그런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쓸데없는 질문이었고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질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잘못된 질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대변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아직도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성경을 읽을 때 정말로 물어야 할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내가 왜 교회에 오게 되었으며 교회에 와서 얻는 복이 무엇인지 이런 중요한 질문들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본문 6절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때에 한심스러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앞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하셨는데 그 약속하신 것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하늘에서 군대를 파송시키시든지 예수님의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일으키시어서 우리나라 이스라엘이 저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독립이 되게 해 주시고 그 독립된 나라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실 것입니까?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이 이스라엘의 독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민족이 다른 나라에 억압을 당하고 사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의 소원은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구주로 오셨다고 하니까 당연히 이스라엘나라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시켜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독립이 되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그 나라를 다스리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총리도 되고 장관도 되고 권력이 있는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아니지만 바로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시대 때 우리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압박과 서러움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원은 독립이었을 것입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어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간절한 소원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서 그 질문이 아주 나쁜 질문이며 잘못된 질문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하는 질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하나님나라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오해를 하고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성도들이 이들처럼 잘못된 질문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교회에 출입을 하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언제쯤 좀 형편이 풀리게 될까요?

언제쯤 돈을 좀 벌게 될까요?

언제쯤 좀 출세를 하고 떵떵거리며 살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복의 참된 의미를 알고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행복을 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머리에 이 행복이라는 것이 잘못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쾌락이 행복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남보다 내가 더 잘나고 내가 더 많이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법이든지 합법이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복 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행복한 삶을 주세요. 언제 그런 삶을 살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교회에 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져서 이제는 교회가 원래의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단 한 번도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부자로 잘 살게 해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옷이 두벌 있는 사람은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꾸 창고에 쌓기만 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고 부자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축복하고 언제 그 부자가 되게 해 주실 것이냐는 질문이 최고의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단이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두들 즉 목적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교회를 아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여러분은 무슨 질문을 하고 싶습니까?

예수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까?

어느 대학을 가고 누구와 결혼을 하고 무슨 직업을 가지고 살면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당시의 제자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주신 것이 맞습니까?

제가 거듭난 백성이고 제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였고 제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진짜 진리입니까?

제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진짜입니까?

제가 가라지가 아니고 알곡임이 분명합니까?

성령님께서 제 속에도 와 계신 것이 맞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제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고 있습니까?

똑바로 못살아서 나중에 저를 모른다고 하시고 쫓아내실 것은 아닙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 세상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일보다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목적으로 하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알 바 아니요

7절 말씀에 제자들의 그런 잘못된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잘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나라를 오해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하여 회복되는 때가 언제인가를 질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바르게 해석을 하시고 바른 대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를 질문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회복되어 임하는 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시고 새로운 천국을 건설하실 때입니다.

 

여기 “때와 시기”에서 “때”는 시간의 지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오실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정해진 그 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얼마나 세월이 흐른 후에 있을 것인지 그 날짜와 시간이 언제일 것인지 그런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시기가 그 날이 언제쯤 될 것인가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있는 재산 다 팔아서 실컷 먹고 마시고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곧 오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장기전으로 재산을 모으고 오래 오래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실컷 놀다가 예수님 만날 그때가 되면 어른 십자가의 강도처럼 한번 회개하고 하나님나라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와 시기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예수님 오시면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엉뚱한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잘못된 질문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잘못된 질문을 하면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온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목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에 대한 질문들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