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16.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골33)

본문 : 골 4:10-14

제목 :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다 쓴 후에 문안인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문안한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안부를 묻는다는 말입니다.

평안하신지를 여쭈어본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잘 계신지 여쭈어보면서 인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평안여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평안하시도록 기원하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인사는 나라마다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당시의 관심사에 따라서 문안인사가 달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 때 인사는 주로 “식사하셨습니까?” 라는 인사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식사여부를 물어보는 것이 인사였고 그 인사 속에는 끼니를 거르지 않고 식사를 잘 하시라는 기원도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인사가 좀 바뀌었습니다.

요즘 인사는 “건강하시지요?” 혹은 “별일 없으시지요?”라는 인사를 만이 합니다.

건강이 주요 관심사이고 또 세상이 너무 복잡하니까 특별한 일이 없느냐고 여쭙는 것이 주요 인사입니다.

 

당시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시대의 관심사는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에 기록된 인사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부터 거의 모든 서신서에 인사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들의 관심사는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인사는 살롬 즉 평강 혹은 평화가 그들의 인사였습니다.

그 인사에다가 바울은 은혜를 앞에다가 붙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그리고 우리 인간들 사이를 평화롭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문안하면서 그 문안의 내용 또한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죄인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은혜를 놓치지 말고 은혜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를 통해야만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안의 인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인사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안 인사를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고 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참된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 되라고 문안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문안하는 사람들

문안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서 그 문안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문안했다면 그냥 보통 인사를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안하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그 문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문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안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냥 단순히 편지 끝에 의례적으로 쓰는 문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의 중요성을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골로새교회에 문안하는 사람들이 여섯 명이 등장합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 데마 이 여섯 사람입니다.

이 여섯 사람 중에는 유대인이 세 사람 그리고 이방인이 세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는 유대인 출신으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에바브라 누가 데마는 이방인 출신으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1)할례파로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본문 11절에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를 가리켜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제일 큰 관심사는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가 제일 큰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구약성경 즉 유대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하신 약속대로 오신 분이고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구약시대에 행하였던 할례나 절기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골로새교회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유대교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랍비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금식과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고 바울의 주장이 확실한 것임을 말해주기 위해서 유대인 출신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편지를 지지하고 이 편지대로 살 것을 권면하면서 안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지만 바울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지지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유대인들이 가졌던 구약성경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그 본문으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구약의 율법들을 설교하면서 마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직접 연관을 시키지는 않지만 복을 받는 것을 설명하면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일부 이단들은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반문을 하고 왜 유월절 같은 절기를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면서 우리가 틀렸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기를 예수님만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만 믿으면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다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바르게 믿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믿는다고 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의미를 바로 알고 바르게 고백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율법들은 우리 인간들이 지켜야할 바른 윤리도덕이 들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고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용설명서와도 같은 율법들을 잘 지켜서 인간답게 바르게 잘살자고 하는 것은 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있다든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유일한 복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이방인들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 문안을 하는 사람들 중에 이방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와 누가와 데마 세 사람이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인간을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개종을 하고나서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고 이방인이지만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가끔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회심을 하기 전에 각자 나름대로 자기들의 신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개종을 하기 전에 자신이 신을 섬기던 관습을 따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혼란스런 마음을 가진 이방인들에게 같은 이방인으로서 문안 인사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도 옛날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 가졌던 다른 종교들의 영향 때문에 기독교가 많이 변질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불교의 영향 때문에 종교란 고행을 하고 수양을 하고 선을 행함으로 자신을 다듬어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좋게 봅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금식을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스스로를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유교의 영향 때문에 종교란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삶을 살고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교의 신앙 때문에 뭔가 신비하고 이상한 현상을 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이 마음에 소원이었기 때문에 종교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게 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런 옛날 우리조상들이 가졌던 신앙 때문에 그것과 전혀 다른 이신칭의의 진리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이 이방인 출신인 이 사람들의 문안의 목적일 것입니다.

 

 

3)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바울은 서신서의 대부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신서에만 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인데 바울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서신서 외에 다른 책을 기록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가라는 사람이 문안을 한다고 했는데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지만 사도 베드로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유대인의 눈으로 보고 그대로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런 마가가 바울의 서신서가 진리임을 동의하면서 문안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누가라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누가복음서를 기록하였고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의학공부를 하여 의사가 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실 때 의사의 입장에서 자세히 보고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과 성령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것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다 보고 기록을 한 사람입니다.

 

이런 기독교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들이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문안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복음이 진실함을 증언하고 그 진리대로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2.문안하는 사람들의 소망

오늘 본문에서 문안하는 사람들이 무슨 내용으로 문안을 하는지는 기록하지 않았고 문안한다는 것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문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간접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소망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라

본문 11절 말씀에 문안하는 유대인 세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들을 “이들만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또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만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이야기 할 때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마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와 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 이 두 나라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별개로 생각을 합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한 천국만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에 사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의로워진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도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역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 있으라.

본문 12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골로새교회의 이단들의 문제로 바울을 방문했던 사람입니다.

그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골로새교회의 교인들을 문안하고 있습니다.

 

그런 에바브라를 바울은 항상 너희를 위해서 애써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간절한 기도의 내용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이 아직 미성숙한 가운데 있고 그나마 온갖 이단들이 엉뚱한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몹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를 보고 진리를 완전하게 알고 그 진리 안에 확신을 가지고 서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완전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내가 왜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교회에만 왔다가 갔다가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 배웠던 성경지식 몇 가지로 옛날에 들었던 설교 몇 편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적인 지식으로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배우시기 바랍니다.

완전하게 다 알 때까지 완전하게 다 이해될 때까지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설교라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부분적으로만 알고 다 이해하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진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진리를 바르게 알고 확신한 사람은 삶을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이 장난이 아니고 믿음이 장난이 아닙니다.

 

제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살펴보는데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을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강 적당히 남을 속이면서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습니다.

 

길가다가 담배꽁초 하나 버리는 것 별것 아닙니다.

길에다가 쓰레기 하나 버리는 것 별것 아닙니다.

운전하다가 신호 한 두 번 위반하는 것 별것 아닙니다.

학교가기 싫어서 한두 번 결석하는 것 별것 아닙니다.

교회 한두 번 결석한다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일이라도 확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소한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은 점점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인생을 우습게 여기게 되고 진지하지 못하게 인생을 장난삼아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나의 사소한 무책임 때문에 이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위험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더 심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렇게 시시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 것인가는 분명하게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해가던 동역 자들이 여러분을 문안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진리 안에서 확실하게 서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역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고 확실히 믿어서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굳세게 걸어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