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2.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종합06)

본문 : 마 6:1

제목 :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있는 어떤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 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 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 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 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켜보려고 하고 나라와 온 세상을 변화시켜보려고 했던 성공회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 변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곤충들의 한살이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비는 알에서 유충(애벌레)이 되고 번데기가 되었다가 성충(나비)으로 변태됩니다.

잠자리는 물속에다가 알을 낳으면 처음에는 물속에서 사는 유충이 되어서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물 밖으로 나와서 그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나는 잠자리로 변합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외형적인 모습은 변화되지 않지만 세상 사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은 그런 곤충들보다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징그러워하는 구더기 같은 존재에서 나비와 같은 귀하고 아름다운 신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물속에서 살다가 하늘을 나는 잠자리가 되는 것처럼 죄악 된 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살다가 푸른 하늘과 같은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이 우리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분이 엄청나게 변화되었는데 삶은 옛날의 습관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죄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깨끗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었으면 모든 삶의 원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내용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가 더 복이 있으며

웃고 즐기는 것 보다는 애통한 자가 더 복이 있으며

온유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냐는 존재감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별 볼 일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소금과도 같이 빚과도 같이 꼭 있어야 하며 그 진가를 발휘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도 모르고 억지로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는 참된 축복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삶의 기초이며 축복의 통로가 되며 이로 인해 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제사나 절기를 다 완성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지키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기본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적인 마음에서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려는 그런 마음으로 변해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가 그동안 알아 왔던 것들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삽니다.

당시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외형적인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나머지 중심적인 내용은 없고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것만 남아 있었고 더러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체면치레를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속이 없이 겉으로만 그런 척 하는 일들을 잘 합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는데 사람들 보기가 미안해서 그냥 그런 척 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그런 체면치레적인 행동들을 아시고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무엇을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를 행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고 철저하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의로운 행위를 세 가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가 우리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가장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할 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1.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하지 말라.

구제는 교회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제를 해야 한다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런 말씀을 따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제하는 것이 그들의 공적을 쌓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심이 많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무엇을 보고 판단하는가 하면 구제를 하는 것을 보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고 구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구제는 반드시 해야 할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 구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구제는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받을 상을 이미 받아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제는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남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내 것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남에게 한 푼도 못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번 돈인데 남을 줍니까?

얼마나 귀한 것인데 남을 위해서 씁니까?

그 귀한 것을 남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주는데 생색이라도 내야 되지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줍니까?

남에게 이익을 주지 않고 자기 잘난 것만 자랑하는 사람도 나팔을 불고 난리를 치면서 자랑을 하는데 이렇게 귀한 일을 하면서 어떻게 자랑하지 않고 은밀하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알고 보면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누어주면서 나를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줄 만큼 무엇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다 같이 잘 살기를 원하시지만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부를 독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누어주는 것이 사실 나의 몫이 아니라 나누어주어야 할 그 사람의 몫을 내가 더 가지고 온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제를 하는 것은 나무나 당연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드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내 몫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의 몫임을 알고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없으면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없이는 구제를 하면서 자랑하지 않고 은밀하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입니다.

여러분의 수중에 재정적으로 좀 여유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의 몫입니다.

혼자 잘 살려고 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나누어주면서 살라는 것이 구제의 바른 뜻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성도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평가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좋은 것일수록 가짜가 많고 부작용도 많은 법입니다.

기도처럼 좋은 것이 더 없는데 기도처럼 잘못된 기도가 많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많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거나 또 성도들이 기도하는 모습들을 살펴보면 기도만큼 다양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좀 아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또 기도하면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음을 봅니다.

기도에 대해서 너무나 잘못된 편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한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서 기도에 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기도란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기도란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란 사람의 뜻을 관철시켜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잘 인용하는 예화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과부가 재판장을 귀찮게 해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부처럼 귀찮아서 응답을 해주시도록 하나님을 조르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떼를 쓰는 것만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도를 엉뚱하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누가 돌봐줄 사람도 없고 스스로의 힘도 없는 과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원한이 맺힌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는 초신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고 우리 스스로 그 억울함을 해결할 힘이 없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초신자 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해결할 힘도 있고 별로 억울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고 이미 하나님의 뜻도 알고 섭리도 알 만한 사람이 항상 그렇게 떼를 쓰면서 기도하는 일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아이 때는 그렇게 합니다.

마음대로 안 되면 울어버립니다. 떼를 씁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아이 뜻대로 들어줍니다.

그런데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는데도 철부지 아이 때처럼 그렇게 떼를 쓰고 울어대면 아마 몽둥이를 가지고 오든지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고 할 것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란 교회에 와서 시간을 정하고 하는 그런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정합니다.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기도를 함으로 더 힘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하는 것만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수시로 무시로 어느 곳에서나 항상 해야 합니다.

집에 있을 때에나 회사에 갔을 때나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방신들과 같이 어느 한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늘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곡조를 붙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기도입니다.

수시로 무시로 여기서나 저기서나 찬송으로 시로 대화로 묵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모든 것이 다 기도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기도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꼭 교회에 와서 눈을 감고 형식을 갖추어서 아뢰는 것만 기도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만 자기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3.외식하는 자들처럼 금식하지 말라.

금식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제나 기도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여러 가지 일들에 금식을 했던 것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금식은 하나님을 조르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처럼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그냥 기도하기 보다는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니까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단식농성을 합니다.

그냥 이렇게 해 달라고 하면 안 해주니까 극단적으로 목숨을 내걸고 단식하고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성도들이 금식을 할 때도 그와 같은 뜻으로 금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금식은 그런 투쟁을 위한 금식이 아닙니다.

자기성찰을 위해서 금식을 합니다.

자기 자신이 쾌락의 길로 가지 않고 절제하고 더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그렇게 고통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세상쾌락에 빠지려고 할 때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려고 할 때 우리 스스로를 그런 세상 쾌락에 바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려는 결심을 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금식은 꼭 음식물로 제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락을 끊기도 하고 술이나 담배를 금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내가 즐기는 것들을 제한해봄으로서 내가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보는 것이 오늘날의 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서 내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보고 내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고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을 갖기 위한 것이 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금식이라고 한다면 그런 금식을 누구에게 자랑하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이기에 하나님 앞에서만 은밀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바르게 사는데 나는 잘 안 돼서 금식까지 하면서 잘못을 고치고 회개하는데 그것이 뭐 자랑거리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의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바른 신앙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