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4.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골07)

본문 : 골 1:24

제목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나라에 교회가 들어올 초창기 시대에는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는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는 바꾸거나 버리거나 희생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정성껏 드렸던 조상에 대한 제사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거의 모든 가정들이 다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지 않고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아주 큰 문젯거리였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고 교회에 나간다고 집안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주일날 일을 안 하고 교회에 나가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일요일도 없이 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겨우 첫 주, 삼주에나 놀고 휴일이 없었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간다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즐겨마시던 술도 끊어야 하고 담배도 끊어야 하고 세상적인 오락도 끊어야 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또 대부분의 교회들이 새로 개척을 하는 교회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집을 팔고 물질적으로 희생을 해야만 교회당도 건축하고 큰 교회로 세워나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물질로 희생을 하면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요즘은 그런 희생이나 헌신이 별로 필요가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제사문제나 주일성수 문제 또 물질적인 희생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 지어진 대형교회도 많이 있고 교회마다 그냥 출석만 해 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교회 가 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잘 해서 이 세상에서도 대접받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교회에 와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 라고 하면 무슨 생각들을 하게 될까요?

 

 

괴로움? 고난? 즐겁고 평안하게 살아보려고 교회에 다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고 괴로움을 기뻐하라고 하면 고난을 자청해서 당하라고 하면 계속해서 교회에 다니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나 그런 괴로움이나 고난이 있었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런 괴로움이나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에게나 그런 괴로움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려고 하면 오늘날에도 고난은 있습니다.

진리 안에 바로 서서 우리 주님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면 괴로움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토록 복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게 그렇게 고난도 없고 괴로움도 없이 그냥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괴로움은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난은 일부러 당하기를 자처할 수 있는 귀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렇게 괴로움도 기뻐하고 고난도 자기 육체에 채우려고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울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하신 고난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하신 고난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신 모든 삶이 고난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심도 고난이며 살아가는 모든 삶도 고난의 삶이셨으며 마지막 십자가의 죽으심은 극심한 고난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엄청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그 높으신 보좌를 버리고 천하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실 때도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분으로 왕이나 종교지도자들 위에서 군림을 하시면서 명령을 하셔도 될 일이지만 천한 사람들과 함께 머리두실 곳도 없는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존경을 받으시기는커녕 조롱을 받으시고 시험을 당하시고 채찍과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당하시면서 까지 고난의 삶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예수님이 힘이 없으셨거나, 실패를 하셨거나 어쩔 수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고난 후에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을 다시 차지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왕으로 최후의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은 우리에게도 영광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부여 받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 것이고

우리 주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깜깜한 암흑 속에서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도 모른 채로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신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면서 기쁨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도 같은 원리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없는 성공을 기대하고 수고도 노력도 없이 일확천금을 노리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고를 많이 하는 사람 고난을 많이 당하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성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시는데 우리 인간이 수고도 노력도 없이 큰일을 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산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모든 것이 공짜라고 생각합니다.

받을만한 자격이나 공로도 없는 사람이 그냥 값없이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 엄청난 값을 치르셨다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노력도 없이 희생도 없이 그냥 주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남의 도움만 받고 사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돈이 많으니까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도와주어도 별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많이 있는 것 가지고 주는 것이니까 당연하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삶을 보세요. 그냥 부자가 된 사람이 있는지 먹을 것 잘 안 먹고 사치하지 않고 어렵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돈은 희생의 결과이고 고통의 결과이고 자기 생명입니다.

그것을 남을 위해서 준다는 것은 보통 마음먹고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때도 그냥 쉽게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그렇게 비참한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은혜를 바르게 받을 수 있고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께서 이미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남은 고난을 잘 못 이해하면 엄청나게 잘못된 결과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다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 남은 고난을 찾아서 채워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천주교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다 받지 않으시고 남겨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고난을 당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절반쯤은 책임을 져 주시지만 인간 편에서 절반쯤을 채우기 위해서 선행도 해야 하고 고행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꼭 이런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고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편에서 어떤 삶을 사는가에 따라서 구원을 받기도 하고 멸망에 이르기도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완전한 고난이셨습니다.

더 이상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고 누구나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충분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셨다”고 말씀을 하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죽으심이 완전한 죽으심임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외에 다른 것을 갖다가 붙이면 절대로 안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심으로 완전하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우리 편에서 할 일은 그 사실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뿐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거나 고행을 해야 한다거나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유일한 조건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이 그런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잘 못 이해를 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 성경이 번역한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말로도 번역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완전하게 다 받으셨지만 이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을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을 꼭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도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는 말씀으로도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 성도들은 우리 교회의 몸이 되기 때문에 몸인 교회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 주님께서도 함께 고난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들이 당함으로 함께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님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고난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 성도들이 교회의 몸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신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고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내 육체에 채워야 할 고난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받는 괴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즉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괴로움이나 고난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이 무엇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받아야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파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감옥에 갇힐 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너무나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위대한 일을 하는 바울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붙잡아다가 죄인취급을 하고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데 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옥에 갇혀있느냐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지 빌립보 감옥에서처럼 찬송을 하든지 그러면 옥문도 열릴 것이고 거기 그렇게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남겨주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고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천국을 전하는 것은 천국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천국에 가자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이 있는데 뭐하려고 천국까지 가려고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지상낙원을 만들어서 잘 살자고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나라 교회도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성공적으로 키워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천국에 가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충성하고 복 받아서 이 땅에 아름다운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자고 말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도 하나님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고 말합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고난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 이 세상을 사는 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사는 한 우리에게 남겨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이 세상의 축복의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 고난의 복음 영원한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 영원한 천국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 참된 교회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정말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각자에게도 주어진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여러분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면 여러분에게도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여러분의 육체에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그 고난을 감당하고 그 고난의 십자가을 달게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조금도 고난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잘 먹고 잘 살고 출세하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합니다.

 

 

일부 사이비 부흥사들이 일부 욕심에 눈이 어두운 잘못 목사들이 전하는 엉터리 설교를 듣고 이 세상에서 더 잘살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가 가야할 길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교만함이 지나친 욕심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복음과 반대되는 길로 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까지 이런 고난의 삶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막아버리고 마음의 문도 닫아버립니다.

교회 오는 시간도 아까워서 겨우겨우 오고 교회에 와서도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정성을 다하지 않고 그냥 대강 부르는 척하고 아예 입을 막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남을 속이는 일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돈만 벌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난하게 살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가난하지만 바르게 살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그저 구경꾼의 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지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주님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고난을 외면하고 잘 먹고 잘 살려고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 그로인한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