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7.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66)

본문 : 마 7:26-27

제목 : 참된 신앙고백의 평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모래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가지고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결론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비유의 주요 핵심적인 결론은 우리의 신앙고백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신서에 있는 교리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행을 하거나 선을 행하거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즉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고백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그가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이 문제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주여 주여 라고 고백을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는 거짓고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진성성에 대한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평가에 합격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진정한 신앙 고백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즉각 즉각 시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참 힘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가족이나 재산이나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잡혀가서 감옥살이를 하고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앙고백의 진정성에 대해서 의심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위험들이 없습니다.

물론 약간의 시간적인 손해 약간의 물질적인 희생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정도를 가지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예비 시험을 한 번씩 치러보아야 합니다.

가끔씩 나 자신을 스스로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고 본 시험에도 합격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면서 나의 신앙고백은 진실한가?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가? 시험이오면 합격할 수 있겠는가를 한번 점검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평가 기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있으시다는 것은 여러분이 자주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평가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의인이요 좋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신앙고백이 없는 사람은 죄인이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할 평가의 기준은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에 대한 평가 기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말로는 주여 주여 라고 하는데 과연 진심으로 그 고백을 하고 있는가를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1)가난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여덟 가지 복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덟 가지 복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각각 다른 복이 아니라 한 가지의 복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는가가 그 복의 중심이고 그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마음의 상태를 여덟 가지 측면에서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다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여덟 가지 마음의 상태 중에 제일 먼저 언급이 되어 있고 또 나머지 일곱 가지를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은 심령의 가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이라는 말은 영적인 측면에서의 가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가난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 육신의 가난함이나 마음의 가난함이나 다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말입니다.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심적으로 가난한 것이 결국 영적인 면 즉, 신앙적인 면에서의 가난으로 연결이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엄청나게 부요하신 분이시고 나는 엄청나게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복을 받는 시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될 때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될 때 그 사람은 진정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고백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난함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과 연결이 되는 것이고 그 애통함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온유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함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게 하고

그 가난함이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되게 합니다.

그 가난함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그 가난함이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합니다.

그 가난함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게 합니다.

 

가난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엄청나게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없다면 나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사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진실 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나 자신을 자랑할 만한 자랑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교만하게 나를 앞세우고 사신다면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가.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들이고 우리가 지킬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도 참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렇게 살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설명해 주신 것도 사실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흉내만 내면서 마치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의 참된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해석해주신 율법을 대하면서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살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 앞에 우리 자신이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율법에 들어 있는 삶의 참된 의미들을 깨닫고 그렇게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나라에 살기를 희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완벽하게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더 말씀을 잘 지키면서 행복함을 누릴까 생각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은혜만 알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고백의 진정성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3)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앞에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6:1)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고 그 하나님께 상을 받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나, 구제 즉 헌금이나, 금식이나 이런 의로운 일을 행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칭찬받고 인정받는 순간에 그 상급은 이미 받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예배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거나 그냥 구경하거나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계시는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고 그 말씀을 겸손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찬송을 드리고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또 기도나 구제나 금식 같은 종교적 행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정한 신앙고백이 된다는 것입니다.

 

4)참된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봐라 구하면 받고 찾으면 찾아지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으니까 뭐든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보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고백자라고 한다면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나라 가는 길을 찾고 하나님나라 들어가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참된 신앙의 고백자라는 것입니다.

 

5)좁은 문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가는 길이 협착하여서 찾는 사람들이 적지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가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좁은 문 협착한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넓은 문 쉽고 편한 길을 요구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가는 길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졌다면 우리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이 따르는 신앙, 헌신이 따르는 신앙, 좁은 길을 가면서도 기뻐하며 따르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사는가.

나무가 존재하는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당연히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시나무나 엉겅퀴 같은 별 볼일 없는 나무가 아니고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좋은 나무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이 되었다면 당연히 그 신분에 맞는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분의 변화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단 이런 것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고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생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엄청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살 때 우리의 신앙이 진정한 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2.평가 방법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평가 방법은 비와 창수와 바람을 통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진정성의 평가는 이 세상에서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비바람을 통해서 즉 인생의 시련들을 통해서 평가를 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대로 비는 하늘로부터 오는 시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고 그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연단시키는 방법으로 사용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수는 세상의 유혹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의 쾌락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재미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람은 사탄의 유혹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것을 사탄이 제일 배가 아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자기편이 만들게 하고 자기와 함께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사탄의 유혹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탄은 우리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가 넘어가지 좋을만한 미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험은 크게 두 가지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일에 사용을 합니다.

교회 내에는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씨만 심으셨는데 사탄이 와서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평가방법들을 통해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라지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들도 함께 천국에 들어가짐 못하도록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을 더 강하게 하시기 위해서 훈련 방법으로 사용을 하십니다.

그냥 두면 신앙이 시들시들 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알곡임에도 불구하고 가라지처럼 되기 쉽기 때문에 강한 신앙을 가지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교회를 나가는 사람은 가라지임이 분명하고 참고 견디고 승리하는 사람은 알곡임이 분명합니다.

어려움이 다가올 때 하나하나 잘 견디고 승리하는 사람은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훈련을 잘 견디면 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군에 가면 1년에 한번쯤 유격훈련이라는 것을 받습니다.

엄청나게 고된 훈련입니다.

그런 훈련을 받으면서 왜 이렇게 힘든 훈련을 시킬까 불평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훈련을 받고 나면 군 생활이 참 쉬워집니다.

다른 훈련이나 생활을 그 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때는 참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어려움을 참고 이기고 나면 인생이 너무나 쉬워집니다.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고난이 주는 축복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의 와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아브라함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어찌 그런 당치도 않은 일을 조금도 불평이 없이 순종을 하고 합격을 했을까 참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이미 그 시험의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대신 죽일 어린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어린양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일까지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일들을 믿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들도 이미 해결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를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천국 문 앞에서 시행하는 평가나 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하실 때 시행하는 평가는 너무나 쉽습니다.

 

세상 살면서 미리 보았던 예비고사를 가지고 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험에서 승리하고 그 때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무조건 합격입니다.

아직도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러면 무조건 합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에 합격을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런 시련들을 참고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갈 그때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믿음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우리가 간직한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3.평가 결과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최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어지 조금 부분적으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집으로는 다시 쓸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무너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열매가 없는 나무의 비유에서는 찍어서 불에 던져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끔찍한 비유입니다.

도끼로 찍고 불에 던져서 흔적도 없이 태워버린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생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시는 것은 나가서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버림을 받은 인생들이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평가에 합격한 자들에게는 천국의 소유자가 되게 해 주시고 이 세상에서도 굳게 세워주시고 천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의 행복도 덤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세상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평가에서의 합격 불합격은 이 세상의 어떤 평가의 합격 불합격과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

이 평가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불합격자냐 영원한 멸망이고

합격자냐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의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평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늘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는 한 사람도 이 평가에 낙오해서 이 진리의 길에서 떠나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 합격하시고 이 믿음을 끝까지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