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7.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25)

본문 : 마 6:7-8

제목 : 기도할 때에 2.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교회가 참 많이 변질이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정도 조금 부분적으로 변질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면에서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회의 모습이 변질이 된 것 같습니다.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하지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교회의 교인 많이 모아서 뭔가 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전도를 합니다.

 

 

찬양들은 많이 하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노래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분을 맞추는 노래들을 많이 합니다.

 

 

헌금들은 많이 하는데 그 헌금이 정말로 주님의 나라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쓰이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헌금이 아니라 바친 사람이 복 받고 잘 살고 또 받은 사람이 그 헌금으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헌금을 강요하고 억지로라도 헌금을 합니다.

 

 

성도라는 사람은 많은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은 참 많은데 목사다운 목사는 많지 않습니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는 온통 도시를 물들이고 있는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지금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이 기도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는 하는데(엄청나게들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자기 욕심 채우기 위해서 복 많이 받아서 잘 살아보려고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교회의 중요한 중심의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변질이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누군가가 다시 한 번 교회를 개혁해야 될 대가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 우리 개혁주의 목회자훈련원에서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고신대학교 교수이신 이상규 교수님을 모시고 세미나를 합니다.

작년부터 마음먹고 계획했던 일인데 일이 계획대로 추진이 잘 되어서 9월 20일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로 교회가 변질 될 때마다 교회를 개혁해왔습니다.

교회가 변질되어서 인본주의로 빠져갈 때 하나님 중심으로 개혁했습니다.

교회가 변질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사람의 경험이나 전통이나 말을 중요하게 여길 때 성경중심의 교회로 개혁을 했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중심으로 세력화 되어갈 때 참된 교회중심으로 개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기본원리를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라고 하고 또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개혁주의를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3장 21-28절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개혁주의라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우리의 모든 삶에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에 우리의 기도에 우리의 삶에 바르게 연결될 때 우리가 개혁주의자로서의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배우고 있는데 기도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에 따라 이 기도에 대한 사상이 매우 다릅니다.

그 이유는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알아도 개혁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기도에 대한 설교가 좀 이상하게 들리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개혁주의적인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를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1.이방인들처럼 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먼저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이방인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것으로 알지 말고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이방인들의 기도

이방인들은 당시에 유대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서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의 종교는 우리와 다르게 인본주의의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여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복을 받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게 하는 사람 중심의 종교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분히 사람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중심이 아니라 그 기도를 하는 자신의 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신을 이용하는 기도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기도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도가 지금은 세속화 되어서 기독교의 잘못된 기도처럼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원래는 자기 수양을 위해서 진리를 깨닫고 모든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자기 수양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불교는 사실 석가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수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을 다스려서 자신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1000일 동안 기도를 하고 108배를 하고 그런 반복을 통하여 득도를 하야야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타락으로 인한 자기 소원성취 부귀영화를 위한 기도이든지 자기 자신을 다스려서 신이 되려고 하는 고행의 기도이든지 그런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기도에 이런 요소들이 많이 가미 되어 있는 것은 알게 모르게 그런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는 다 마찬가지이겠지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많이 변질이 된 것입니다.

 

 

2)중언부언하는 기도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밧톨로게오(βαττολγέ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말 더듬이였던 바투스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babbling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단어의 뜻은 나불나불 수다를 떤다는 뜻입니다.

 

 

'중언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을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엘리야 선지자가 대결을 벌리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알선지자들이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응답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제단 주위를 돌며 뛰기도 하고 나중에는 안 되니까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찔러서 피가 나오게 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불교의 기도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읽어봐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진리를 깨닫고 인간 본연의 영원한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기원정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염주를 돌리면서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그 소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염주 대신 묵주라는 것을 돌리면서 그들이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기도를 합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 염주나 묵주는 없지만 기도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의식하지도 않는 내용들을 중언부언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변질된 기도의 모습입니다.

 

 

3)말을 많이 하여야 응답받는 줄 아는 기도

이방종교의 기도의 응답은 다분히 그 기도의 횟수나 길이에 의해서 좌우가 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게 된다는 뜻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일 것입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야 신이 감동해서 그 기도를 들어 준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기도는 지극정성으로 오랫동안 많은 횟수로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그냥 묵상을 해서도 안 되고 무슨 말이든지 열심히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는 말이라도 많이 하고 열심히 해야 기도를 들어준다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 때문에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도 말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기도를 좀 짧게 하면 사람들이 기도도 못한다. 그렇게 간단히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시겠는가 라고 비난을 합니다.

 

기도를 길게 많이 하려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말도 잘 안 되는 말도 또 하고 자꾸 길게 늘려야 기도를 잘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모임에 장로님을 기도를 시켰더니 모처럼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길게 기도를 하는데 창세기에서 말라기의 사건까지 다 들먹이면서 기도를 하더니 또 신약 복음서로 해서 서신서로 해서 성경을 한 바퀴 다 돌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기도에 은혜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아멘을 하기를 기대하고 눈을 떴는데 아멘을 하는 사람이 장로님하고 목사님 두 사람 뿐이더랍니다.

 

놀란 장로님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을 하시기를 아까 노아 홍수 때 다 떠내려 가버리고 장로님과 저만 남았다고 했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이런 이방인들이 드리는 기도와 전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중언부언 하거나 말을 많이 하여야 기도를 들을 줄 아는 잘못된 생각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 너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본문 8절 말씀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1)구하기 전에 있어야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우리나라 속담에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이가 배가 고프면 웁니다. 그 우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아이가 배가 고프구나 하고 젖을 물려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을 아는 사람들은 기도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꾸 보채고 울어야 응답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현명한 어머니들은 아이가 울기 전에 젖을 줍니다.

아이가 몇 시간마다 얼마만큼 먹어야 되는지 알기 때문에 울기 전에 미리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현명한 어머니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하나 다 보고를 드리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은 모르시고 나는 다 아는 것처럼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고 미리 다 준비하신다면 우리가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하나하나를 다 말씀 드리는 것을 좋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처럼 서로 보고 알 수 있다면 기도라는 것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다 아신다면 일일이 다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으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존재 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믿고 말씀을 드리는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시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으면서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나 기도를 하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줄 아시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고 받는 사람과 기도를 하지 않고 받는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받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가 잘나서 잘 사는 줄 알고 하나님을 점점 떠나게 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기도를 하고 받은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2)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배울 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또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방 종교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잘 모릅니다.

알아도 아주 엄한 신으로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의 가르침대로 조상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신이 되어서 우리를 돌보신다고 믿습니다.

그 조상신을 잘 섬깁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우리의 할아버지고 할머니인데 뭐 좀 잘못했다고 그렇게 엄한 벌을 내리고 많은 돈을 들여서 굿을 해야 용서를 해 주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그런 미신이 아닙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어떤 계획을 가지셨는지를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 지혜롭고 변함이 없으신 자비로우신 아버지 그분이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입니다.

 

그 하나님께 그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세상의 이방종교인들이 드리는 기도와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방인들 같이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여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잘 배우셔서 바른 기도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