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30.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05)
본문 : 마 5:7
제목 :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말씀을 할 당시는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로마가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힘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강한 힘을 가진 자만 살아남아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군림하고 살았습니다.

로마의 한 철학자는 긍휼이나 자비는 “영혼의 병이요 연약함의 표시”라고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정의와 용기와 기강과 힘을 숭상했습니다.

로마인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면 살리고 마음에 들지 않고 나약하게 보이면 죽일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인 남편은 원하면 아내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수하에 있는 종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도 같이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로마인들처럼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교만했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비난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워서 죄를 범한 자들을 적발해서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잘못을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고 지바를 베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은 그들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다니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잘못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권이 많이 보장이 되어서 당시처럼 그렇게 무자비한 일은 없습니다.
비참하게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없고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아니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언제 어디서나 힘이 없고 연악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고의나 혹은 과실로 잘못을 저질러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과 상관이 없이 타인의 잘못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도가 잘못돼서 환경이 잘못돼서 유전적인 영향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 모두가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힘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돈이 많다고 자랑은 하지만 하루하루 다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멸망을 향해서 달려가는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이런 자비나 긍휼의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조사해서 폭로해야 자기들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총리나 장관 청문회 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조사를 잘 하는지 몇 번 이사를 했는지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 재산을 얼마나 가졌는지 사생활은 어떤지 다 조사해서 조금만 이상이 있으면 폭로를 하고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남의 식품에 무엇이 들어가지 않았나. 늘 감시하고 심지어는 일부러 빵에다 쥐를 넣어가지고 거짓으로 폭로를 해서 상대방 회사가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이제는 교회들까지 공의를 내세워서 목사와 부목사가 목사와 장로가 성도와 성도가 서로 잘못을 조사해서 폭로하고 싸우는 그런 서글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일이 많을수록 이 세상은 참으로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1.긍휼이란 말의 뜻
먼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긍휼히 여긴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긍휼이란 헬라어에서 엘레에오(ελεεω)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동정심, 자비, 불쌍히 여김, 구제, 친절, 은혜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그 궁핍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이런 행위들을 다 긍휼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긍휼이라고 할 때에 앞에 나오는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최상의 뜻을 가진 말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과 긍휼이 여긴다는 말의 차이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동정의 여지가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이해가 되고 동정심이 생기고 어쩔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불쌍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도 할 수 없고 동정의 여지도 없는 악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동정도 잘 하지 못하는데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생각하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고 진노를 받아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그 인자와 긍휼하심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살아남았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원해서 노력을 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이란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를 용서하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이 악하고 나쁜 사람들에게까지도 동정심을 베풀고 그들을 위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2.긍휼히 여기는 방법
산상보훈의 팔복은 예수님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고 그 성품을 닮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나라를 소유하는 길이고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삶의 전 분야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삶인가를 알려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주로 만난 사람들은 낮고 천한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든 사람들 찾아와서 고쳐주셨습니다.
당시의 의술로서 고칠 수 없는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섰고 눈먼 자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세리나 창기같이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까 당시의 왕들이나 귀족들을 만나는 것이 당연하시겠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오셔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만나 주셨고 그들의 고충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합니다.
상류사회의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합니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능력 있고 강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위해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도 보잘것없고 초라한 사람이 오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돈도 많고 충성도 잘 하는 사람들만 좋아합니다.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합니다.
교회에도 예수님의 마음은 없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2)인생의 비극을 애통해 하심
우리 인생들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죄 때문입니다.
인생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보고 반항하고 높아지려고 했기 때문에 그 죄의 형벌로 이런 비참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죄로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벌을 받는 것을 슬퍼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비극적인 모습을 보시고 애통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에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왔는데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까 죽었던 그 청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나 나사로의 모습에서 우리 인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가야 되는지를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구원받지 못하고 죄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인생들이 정말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지셨습니다.

교회는 그런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옥으로 멸망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인생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못하니까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이나 가르치려고 하고 재미있게 사는 법이나 가르치려 하는 것입니다.

3)진정으로 용서하심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침을 뱉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심한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도 그들을 저주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 용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가 없는 동정은 긍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해서 실수를 저지릅니다.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흉측한 죄라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완전하게 회복시켜주심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일시적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극을 애통해 하시는 것으로 끝이 나지도 않습니다.
또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시는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완전하게 회복시켜주시기 까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 불완전한 몸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완전한 몸으로 부활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몸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불완전한 세상에 두시지 않으시려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그 천국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그 긍휼로 인하여 우리가 이렇게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긍휼히 여기는 자들이 받는 복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들이 좀 혼동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긍휼히 여기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자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 원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은 먼저 그 왕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친구에게 몇 푼 되지 않은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탕감해주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면 얼마 안 되는 푼돈정도는 탕감해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나게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용서 그 은혜 그 사랑은 우리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보너스로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더욱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이 없는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것으로 많은 행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눈으로 세상을 보면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들이 하는 일이 참 이상해 보이고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 나 정말로 저 사람은 이해를 하지 못 하겠어 웬만하면 내가 그냥 넘어 가겠는데 저 사람은 정말로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런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까?
정말로 여러분이 아시는 것이 전부이고 다 옳은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그나마 다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보셨습니까?
어린 나이에 고아로 살아 보셨습니까?
밤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울어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자식을 가슴에 묻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보셨습니까?
불치의 병에 걸려서 사형성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 보셨습니까?

사업하다가 망해서 부도를 내고 숨어서 살아 보셨습니까?
그 비난 그 빚 독촉 당해보셨습니까?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미워하다가 그 쓰라린 이혼의 아픔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옥살이를 해 보셨습니까?
돈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하고 굶어 보셨습니까?

그와 똑같은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비웃고 비난하지 말고 정말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서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긍휼이 여길 때 나도 그런 동정과 이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이해해주고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휼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그 긍휼히 여기심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긍휼히 여기면 사람들도 나를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