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01)
본문 : 마 5:1-3
제목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삽니다.
우리나라는 행복추구권이 헌법에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10조)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고자 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먼저 말씀을 하신 것도 이 행복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사람들은 산상보훈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팔복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산에 올라가서 보배로운 말씀을 해 주셔서 산상보훈이고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말씀하셔서 팔복이라고 하기도 합니다.(아홉 번이지만 한번은 중복으로 보고 팔복이라고 합니다)

이 팔복을 포함한 산상보훈에 관한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성품은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성품들입니다.
이 예수님의 성품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의의 기준이 됩니다.
이 예수님의 성품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또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가장 큰 행복을 가지게 해 줍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귀한 산상보훈의 말씀들을 배우게 됩니다.
조금 어렵고 조심스럽게 배워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높은 차원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고 걱정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그것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고.
또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살게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배우시면서 점점 우리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복이 있나니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많이 쓰는 말도 행복이라는 단어일 것이고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도 복, 축복일 것입니다.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누구나가 다 행복해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르는 자녀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행복이 아니고 또 그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행복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μακαριοs)입니다. 
여기 사용된 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과는 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은 영어에서의 happy라는 단어와 같이 생각하지도 않던 행운이 찾아온 것을 말합니다.
이런 행복은 잘 만날 수가 없습니다. 혹시 한두 번 만난다고 해도 금방 벗어져버리는 허무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적인 행복이란 우리가 애타게 바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이루고 나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허무한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성공이나 쾌락이나 권력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참 좋아하고 그런 것이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잡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경 역사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저는 얼른 솔로몬 왕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그 전에도 없고 그 후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최고의 부귀와 영화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의 재산, 그의 권력, 그의 영화, 그가 가진 지혜, 그리고 그가 누렸던 쾌락들은 아무도 누려보지 못했던 대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후일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행복들이 결국은 다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에만 매달려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세상의 그런 복과는 차원이 다른 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서 이 복을 Blessed라고 번역을 했는데 blessing이란 즉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관계가 되고 우리가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복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복이라고 한다면 산상보훈에 있는 팔복의 말씀은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온유한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그런 세상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복이 세상에서 무조건 고생하고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당하면서 사는 것이 복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복은 영원한 세상을 지향하지만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도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복을 “마음속의 모든 바람이 성취된 내적 기쁨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복을 “인간의 행복은 삶의 기회와 변화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이 줄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복은 누구도 손댈 수도 공격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내적인 평안 내적인 지복 내적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그 성품을 가질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안식이 있고 참된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만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에 매달리지 마시고 주님 안에 있는 이 참된 행복을 바르게 알고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2.심령이 가난한 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성품을 닮아감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성품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 말씀하고 있는 성품은 심령의 가난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난하다는 말로 쓰인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연보 궤에 두 렙돈 헌금하는 한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에서 가난함을 나타내는 페니크로스(πενιχροs)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기 가난함이란 일용할 양식이 부족해서 삶이 좀 어렵고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프토코스(πτωχοs)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움츠러들다 웅크리다 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 거지같이 구걸하는 가난, 비천한 가난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가난은 프토코스입니다.
웅크리고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같이 비참한 가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생활비 때문에 걱정하는 그런 가난이 아니라 아주 비참한 거지같은 가난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가난해야 복이 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듣고 보니 좀 마음이 답답합니다. 생활비 때문에 걱정하는 그런 가난함이야 한번 도전해 볼 수 있겠지만 거리에서 웅크리고 구걸을 해야 먹고 사는 그런 가난함은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걱정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가난이란 우리의 육신 생활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물질적 가난을 예찬한 적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주님은 심령의 가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심령의 가난에 이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육신의 가난함을 통해서 심령의 가난함을 얻습니다.
물질적인 가난 육신의 고통이 심령의 가난과 연결되기가 쉽습니다.
육신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여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지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육신적으로 부자이면서 심령의 가난함도 가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일 불쌍하고 미련한 사람은 육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심령이라는 말은 몸이 아니라 내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를 심령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 구걸을 하고 애원을 하여서 겨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심령이 가난해진 후에야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밤새 하나님과 싸웠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의 환도 뼈를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셨고 야곱은 완전히 쓰러졌습니다.
그 때 그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고 자신이 넘치고 자기의 머리로 잔꾀를 무엇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늘보좌 가운데 계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나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요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그 귀한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며 탕진할 때까지 아버지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아주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서 돼지가 먹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채울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도 많았는데 거기서는 종들도 배불리 먹었는데 내가 이제 돌아가야겠다.
가서 아들 대우를 해 달라고 하지 못하겠지만 그저 품꾼 중에 하나로 여겨달라고 해야겠다. 
이런 결심을 했을 때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하여
그러면 심령이 가난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할까요?
복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되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해져야 되겠는데 그 방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존 맥아더 목사는 세 가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1)혼자서 해보려 하지 말라.
심령이 가난해지기 위해서 나 스스로 혼자 노력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재산을 모두 팔고 너절하고 오래된 옷을 입고 수도원에 앉아 있으면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행이나 자신의 성찰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령이 가난해지려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성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볼 때 우리는 그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설교를 듣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 배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 선을 행하려 하고, 스스로 가난한 마음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육을 주리게 하라
육신의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을 주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 중에는 남에게 칭찬을 받고 남에게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칭찬해주는 맛으로 이 세상을 삽니다.

칭찬을 바라고 칭찬을 받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칭찬을 받지 못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그런 육신의 욕심을 제어해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천국을 소유하는 참된 행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늘 나는 부족하고 칭찬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을 인정할 때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라.
늘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이 마음이 가난해지는 비결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로 인해 세리는 참 나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4)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 것을 알 수 있는 방법
사람들은 설교를 해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지 않으면 자신은 거기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고 설교를 들으셨는데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들을 것도 없어 하고 앉아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자가 되었는지 아직 부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의식을 잃는다고 했습니다.
난데라는 말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경이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안 것만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늘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③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 내어놓을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게 되면 불평이나 원망을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④다른 사람의 탁월함과 나의 연약함만을 본다.
모든 사람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참으로 비천한 사람 즉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⑤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늘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구걸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내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⑥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교만한 죄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편리함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겸손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포기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됩니다.

⑦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는 자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여기 모여 있는 우리는 이미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 여기에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심령이 가난해지라고 하시 않으셨습니다.
이미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복이라는 것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라는 것은 이 심령의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더 가난해지려고 노력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더 풍성하고 복된 삶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