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9.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02)
본문 : 마 5:4
제목 : 애통하는 자의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도들의 행복”이라는 주제로 새해를 시작하고 우리 주님의 성품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산상보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서 그런 선한 것들을 빼앗아가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짓투성이로 만들어서 믿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들고 그 영향으로 하나님도 믿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서로 믿음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데 그런 귀한 믿음을 빼앗아 가 버린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욕심을 부채질해서 모두가 성공하고 모두가 부자가 되고 모두가 권력을 쟁취하도록 부추겨서 가난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해져야 받는 그런 행복도 맛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주제는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온통 웃기는 일로 가득합니다.
웃기는 사람들이 대우를 받고 웃기는 강사들이 인기강사가 되고 심지어 설교를 하는 목사들까지도 웃겨야 인기가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울고 애통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애통하는 자는 앞의 가난한 자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임을 알게 될 때 그 심령에 애통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웃는 것 보다는 애통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애통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알면 애통을 통해서 받게 되는 복이 참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오늘 본문 말씀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참된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애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펜테오’(πενθεω)입니다. 
성경에 슬픔을 나타내는 여러 단어들이 있는데 그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통이라는 말이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 가운데 가장 강한 뉘앙스를 가진 표현입니다.
여기 애통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면서 우는 것을 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아주 옛날 노래 중 가장 가슴 아픈 슬픔을 노래하는 노래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아리 눈물고개 울며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가려 눈못뜨고 헤메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꽁꽁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울며넘던 이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6.25 전쟁 때 지금도 있는 서울 성북구 미아동 그 고갯길에서 북한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그의 아내가 부른 노래입니다.
가족을 뒤에 두고 붙잡혀 가는 남편이나 붙잡혀 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그 먼 길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내의 마음을 잘 나타낸 노래로 비슷한 처지의 삶을 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애창곡입니다.

이 노래제목이 왜 단장의 미아리 고개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단장(斷腸)’이란 말은 끊을 단(斷), 창자 장(腸) 자를 써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말합니다. 

이 단장이라는 말에는 숨은 사연이 있는 말입니다.
옛날 중국의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러 가다가 한 지역을 지나가는데,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옵니다. 
마침내 새끼 원숭이가 배에 올라타자마자 어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슬픔을 가리켜 ‘단장의 슬픔’ 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이라는 단어와 가장 가까운 단어가 바로 이 단장이라는 단어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하며 우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냥 눈물을 흘리는 그런 정도의 슬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고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아픈 가슴으로 우는 그 슬픔을 애통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1) 이 세상의 일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복이 있습니다.
가난한 것도 육신의 가난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이 복이 있다고 했지만 실지로 육신의 가난이 심령의 가난과 연결이 되는 것이고 그 자체로도 많은 유익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애통하는 일도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애통함이 복이 있는 애통함입니다.
육신적으로 눈물을 흘릴 때 영적인 눈물도 흘릴 수 있는 것이고 육신적으로 흘리는 그 눈물에도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8.15 해방 후의 우리나라 교회의 모습은 눈물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의 교회의 모습도 눈물이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면 눈물바다가 됐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 많은 울음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흘리는 영적인 눈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 때문에 우는 사람, 너무나 힘든 세상살이 때문에 우는 사람, 자신이 겪는 억울함 때문에 맺힌 한 때문에 우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흘린 눈물도 헛되지 않아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눈물로 자녀를 키우고 눈물로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고 눈물로 내일을 위해서 일을 했을 때 그 눈물로 오늘날과 같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고 외치면서 마음껏 즐기며 사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부모님들이 흘린 그 눈물 덕분에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다시 우리가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한다면 우리의 노래가 탄식이 되고 가슴을 치면서 탄식할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라를 위하여 애통의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통하여 행복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아주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애통하는 자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면 반드시 회개가 뒤따릅니다.
회개는 애통하는 마음이 있을 때 참된 회개가 수반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에 이를 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기도 합니다.
다만 죄를 지은 후에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그 죄를 회개하는가, 회개하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사울 왕이나 다윗 왕이나 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베드로도 가롯 유다도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에게 차이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했는가, 회개하지 못했는가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은 후 많은 날들을 슬퍼하며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난 후 그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회개의 눈물이 그들을 의로운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나면 그 앞에서 흉악한 나의 죄들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죄를 애통하면서 회개하는 일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 사는 동안 그 일은 계속이 되어야 하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애통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게 되려면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이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애통하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1)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생각해 보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자신이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죄 사함도 동정을 받을만한 여지가 있을 때 말이지 이렇게 흉악한 죄들을 매일같이 짓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길이 있어도 고행이나 선행을 동반하고 완전히 개과천선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길이 아주 쉽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쉽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애통하며 회개할 만한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나 스스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악한 죄인이 없을 것입니다.
자만이나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흉악한 죄인인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 같은 사람도 한 번의 실수로 그렇게 많은 날들을 애통하고 회개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욥같이 당대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도 자신은 죄인이요 죄인 중의 괴수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대단한 착각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착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죄인이요 괴수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애통하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좀 바빠서 생각해볼 겨를이 없습니다.
좀 한가해지면 제가 제 자신을 잘 생각해 보고 그 때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애통해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나에게 주어진 최고의 날일뿐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일을 내일로 미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4) 경박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이 뭐 별거야 하루하루 즐겁고 기쁘게 살면 되지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에 미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박함에서 벗어나서 진지하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그 희생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죄의 흉악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는 자신의 죄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이 지구에 있는 모든 재물 모든 권력 모든 생명들을 다 바친다고 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흉악한 죄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십자가의 능력을 알면 그 앞에서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6) 내가 애통하는 자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내가 애통하면서 사는 사람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간단한 한 가지 방법은 내가 죄에 대해서 민감한 자인가 감각이 무딘 사람인가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여러 가지에서 확인이 됩니다.
도덕적인 죄, 율법적인 죄, 사랑을 베풀지 못한 죄, 남을 업신여기는 죄, 남을 배려하지 않은 죄, 하나님 앞에서의 죄, 사람 앞에서의 죄, 국가 앞에서의 죄, 가족들 앞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 남편의 의무 아내의 의무 부모의 의무 자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
우리의 죄는 어느 한군데만 체크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됩니다. 
나 자신을 잘 살펴서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아야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내가 이런 모든 죄를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용서를 받은 기쁨, 용서를 받은 후에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쳐보는 기쁨, 그런 행복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초적인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3.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라고 했습니다.

그 위로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위로자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인 보혜사라는 말과 위로자라는 말이 헬라어에서는 같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항상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7:17) 
이 땅에서 우리가 흘린 모든 눈물들을 깨끗이 잊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흘린 눈물이 오히려 많은 우리가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로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선수입니다.
이래저래 저는 참 눈물과 인연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떤 특별한 일 때문에 목사가 되었다면 아마도 제가 흘린 그 눈물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언젠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렸을 때는 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장성해서 제 자신의 죄 때문에 많이 울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그런 기도 때문인지 울 일이 많이 생기고 또 많이 울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즐겁고 재미난 일도 많은데 울 일이 뭐가 있는가? 질질 짜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자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세상은 점점 사악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머지않은 날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을 붙잡고 울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세상에 선이 사라지고 악만 남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한국교회 강단을 보면서 누군가가 울지 않으면 교회도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경박한 코미디 같은 세상 이야기들을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 대신에 설교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가 울지 않으면 온갖 이단이나 설치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험한 세상을 어떻게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 교회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간절히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보고 애통해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울고 이웃을 위해서 울고 나라를 위해서 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