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04)
본문 : 벧후 1:5-7
제목 : 더욱 힘써 공급할 것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인생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이런 주제로 토론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시를 쓰거나 노래 가사를 만드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요즘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인지 모두들 이미 다 알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인생이 무엇인지 논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인생을 말하는 것은 그런 철학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인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또 하나는 그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것 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이 부모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남을 당합니다.
물론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만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 이미 우리의 몸에는 설계도가 다 그려져 있어서 그 범위 내에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몸의 크기 모양 성격 많은 부분들이 이미 정해져서 그 정해진 것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는 그 주어진 것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켜서 비록 주어진 범위 내에서이지만 엄청나게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떻게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아주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어진 형편 따라 어영부영 힘없이 살 수도 있고 노력해서 멋있는 인생을 살수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이런 인생의 예를 들어 보았습니다.
믿음도 그와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교리적으로 칭의의 믿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믿음도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미리 예정을 하시고 선택을 하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영혼의 유전인자 속에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넣어 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오고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잘 보여서 멋있는 몸매를 가지고 좋은 집안에 재벌 2세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것도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잘 보이거나 해서 믿음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또 하나의 믿음으로 구별을 합니다.
그것을 교리에서 성화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그 믿음으로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성화의 믿음도 결국은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화의 믿음은 칭의의 믿음과는 달리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노력을 하는가에 따라서 어떻게 배우고 훈련 받는가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더하라”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 공급하라” 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귀하고 보배로운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한 귀한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노력을 하고 힘써서 더하고 공급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의의 믿음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고 이미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믿음과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편없이 보잘것없는 상태에서 흉악한 죄인의 신분에서 이런 귀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을 해서 한꺼번에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죽도록 노력을 해도 완전해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요 그것이 제 2의 믿음 즉 믿음생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이미 받은 믿음에다가 더해야 할 것, 힘써 공급해야 할 것 일곱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귀한 믿음 위대한 약속을 받은 자답게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믿음에 덕을 더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이미 가진 믿음에다가 덕을 더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보배로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보배를 신문에다 똘똘 말아서 구석에 처박아 놓을 수도 있고 아주 소중하게 사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소중하게 여기고 귀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다 덕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더욱 힘써”라고 하는 말은 “함께 일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믿음생활을 할 때에는 나도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즉 성화의 삶을 사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알아야 할 것은 그 성화의 믿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잘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기도로만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나도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믿음에 가장 먼저 더해야 하는 것은 덕이라고 했습니다.

덕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탁월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좋은 사람을 말할 때 덕스럽다. 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goodness로 번역을 했는데 역시 선량, 미덕, 친절, 우애, 자애, 우수, 우량; 탁월 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말에서 덕이란 “마음이 바르고 인도(人道)에 합당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나 덕택을 덕이라는 말로도 씁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려면 먼저 마음이 바르고 선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에 이런 덕스러움이 더해질 때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 되고 성장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본은 은혜에서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귀한 믿음을 가진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의 공로나 나의 노력은 조금도 관계가 없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아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나누어 줄줄도 알고 선도 베풀 줄 알고 양심적으로도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사람은 아주 쌀쌀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옆에 지나가면 찬바람이 쌩하고 불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 있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조금도 없고 불평만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남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그저 자기만 위해서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사람이야 그럴 수밖에 없지만 두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좀 따뜻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나면 포근하고 얘기를 나누면 마음에 기쁨이 오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봐 줄 때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임이 입증이 되는 것이고 내 속에 있는 믿음이 살아 있어서 생명력이 있는 믿음임이 입증이 되는 것이며 성장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따뜻함이 없는 믿음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전혀 활동하지 않는 믿음 그저 가지고만 있는 믿음은 잘못하면 죽은 믿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덕에 지식을 더하라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는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 때 경건한 삶을 살게 하는 지혜와 분별력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양심대로 바르게 산다, 나는 좋은 일을 하면서 산다. 라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서 그 말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양심대로 산다고 하지만 그 양심이 옳은 양심이 못되고 나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일이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지식 즉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삶이 올바른 삶이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알고 하나님의 뜻도 많이 깨닫고 무엇이 바른지 무엇이 나쁜지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또 남에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도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잘못한 지식들 때문에 다른 사람을 오히려 나쁜 길로 가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고혈압이 있었는데 고혈압에 아스피린이 좋다고 누가 권해서 매일 아스피린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위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타민이 좋다고 해서 많이 먹는데 암세포를 보호하는 비타민도 있답니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에게 잘 속는다는 약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마음이 좋으니까 모든 사람이 내 맘 같은 줄 알고 잘 속아 넘어갑니다.
험한 세상에서 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쁜 장사꾼들은 물건을 팔 때 장점만 이야기 하고 단점은 감춥니다.
보험회사들이 보험계약을 할 때 좋은 것만 이야기해서 뭐든지 다 보상을 해 줄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막상 보험금을 타려고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약관에다가 우리 몰래 많이 넣어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선전을 할 때 단점이나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나쁜 목사들 저 사이비 이단들은 나쁜 장사꾼들처럼 장점만 이야기 하고 단점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다 응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순종을 하면 다 축복을 받습니다.
뭐든지 기도하고 바르게 살면 복을 받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해 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다 응답받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괄호열고가 있습니다.
단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하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병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괄호열고가 있습니다.
단 다시 병든다는 것 그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그것은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복은 이 세상에서 부자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해지는 것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사이비 이단들에게 나쁜 목사들에게 쉽게 넘어갑니다.

무엇보다도 지식과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 참된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 알고 그 진리 안에 거하면서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때 덕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지식에 절제를 더하라
우리가 힘써 노력을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이 귀한 믿음에다가 덕을 더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덕에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장에 우리 인간과 하나님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6-8)

그리고 그 나약한 인간의 지식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 12-13).라고 했습니다.

그저 마르고 시드는 풀 같은 인생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바닷물이 얼마나 되는가를 되어보려는 것과 같고 하늘을 뼘으로 재어보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기준을 믿음으로 정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하나님을 따르는 데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식이나 깨달음이 아닌 믿음을 의의 기준으로 정해주신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합니다. 그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이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는 것은 좀 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좀 배우고 학위를 받고 하면 우쭐해져서 하나님을 배반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알량한 지식 때문에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버립니다.

지식의 교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우주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법칙 가운데 수천분의 일, 수억 수조분의 일을 배워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식에 절제를 더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한계를 알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이 덕스러운 삶이요 더욱 믿음생활을 잘 하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절제에 인내를 더하라
믿음에는 덕이 필요하고, 덕에는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하고, 절제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지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면 내가 아는 지식으로 좀 바르게 붙잡아 주어야 되는데 그것을 참기가 힘이 듭니다.

시어머니의 눈으로 며느리가 하는 일을 보면 잘못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참다가 참다가 한마디 하는데 그것이 잔소리로 들립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 시어머니가 아는 지식으로 보면 며느리 하는 일이 못마땅한데 며느리 입장에서 며느리의 지식으로 보면 쓸데없는 잔소리가 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참는 것이 좋습니다.
참는 데는 인내심이 무척이나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참을 인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세 번까지 참을 줄 알면 살인을 해야 될 일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옛날에 공부 좀 했던 사람이면 책상 앞에 써 붙였던 명언입니다.
성질 급한 사람들이 두고 쓰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가끔 폭발을 하지만 그러나 뒤끝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금방 잊어버립니다. 라고 말합니다.
뒤끝은 자기만 없지 상대방 가슴에 남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신앙생활에는 특별히 이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그 소망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의 차이가 많아서 실망을 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주님의 재림의 약속이 더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요 그날이 되면 아주 급하게 바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절제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참고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면서 살아야 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제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심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면 약속의 그날에 우리 주님을 기쁘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는 소중한 약속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믿음을 따라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협력해서 함께 노력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덕을, 덕에는 지식을, 지식에는 절제를, 절제에는 인내를 힘써 더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