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36)
본문 : 벧전 3:15-16
제목 :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고난 속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가 가진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이 신앙을 버리지 말 것과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어느 시대나 다 나름대로 고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생활고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고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렇게 모두에게 다 잘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세상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것은 옛날에 비하면 참 모두들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너무나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 나는 못사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불행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병으로 사고로 실패로 가족관계로 인간관계로 특별한 고통을 겪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
본문 15절 말씀 중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성도란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가 되심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만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서처럼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다고 인정하고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분이시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존경하고 우러러보고 그 은혜를 알고 감사드리고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너무나 귀하신 분이십니다.

마음속에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만나고 싶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분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거룩하게 여기고 살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무렇게나 대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시다고 인정하고 선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예수님을 처음만난 것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부로서 숙달된 기술로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던 그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가르치신 말씀들을 듣고 몸소 살아가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주님은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산신령이나 용왕과 같이 누가 만들어 놓은 신이 아닙니다.
태양이나 달과 같은 피조물도 아닙니다.
호랑이나 소 같은 짐승도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이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가 모시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모르고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시고 사는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혀가셔서 재판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위협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후 다시 찾아주셔서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배반을 한 베드로를 다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찾아주셨고 또 충분히 이해를 해 주셨습니다.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셨고 그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주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변하고 배반하고 속 썩이고 미움 받을 짓만 골라하지만 주님께서는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다 목격을 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승천하시면서 가셔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과 때가 되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고난과 환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만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무 귀한 것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한번 하신 약속은 꼭 지키시는 변한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
본문 15절 말씀 중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생을 하면서도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이기에 도대체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사느냐고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준비는 하고 있는데 누가 물어봐주지 않으니까 말을 해 줄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누가 물어나 봐 줄 것인데 사는 것이 별로 신통치 않으니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가끔 밖에 나가면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저에게 전도지를 줍니다.
전도지를 받으면서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아 이 사람들이 내가 목산데 목사도 몰라보고 전도지를 줘…….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기에 사람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할까 어떤 교회 목사님은 목사님 얼굴만 보고 그 교회에 등록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내 얼굴이 성도답지 못하면 전도지를 다 줄까 라고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기쁘고 즐겁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게 소망에 관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에 관한 질문을 하고 교회는 절망에 관한 대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소위 신앙에 성공을 했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복을 받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예 제가 기도를 많이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예 제가 헌금생활을 잘 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예 제가 금식기도를 해서 우리 아들을 인류대학에 보냈습니다.
예 제가 기도를 해서 아무개 불치병을 고쳤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하는 말이 이런 말이고 강단의 설교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소망에 관한 이야기 즉 천국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말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은 소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기도하면 병이 낫고, 기도하면 성공을 해 이런 이야기는 소망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고 절망을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사람은 백에 한 명, 천에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서울대학에 갔다고 말하는 사람 한 사람을 제가 압니다.
공부를 잘 못했는데 특별히 수학에 약했는데 기도했더니 그날 수학문제가 아는 문제가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제가 수험생들보고 야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 그러면 돼 라고 말한다면 그 학생은 십중팔구 불합격할 것이 뻔합니다.
병이 들면 기도하면 다 나아 아무렇게도 살아도 돼 그렇게 말했다가 그 사람이 건강에 대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벌컥 병이 든다면 그 사람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법칙으로 다스리시지 그 법칙을 깨고 초자연적으로 기적을 일으켜서 통치하시는 것을 극히 제한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우리가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기 하시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브루스 올마이티“ 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위해서 달빛이 더 빛나게 달이 더 크게 보이게 하니까 반대편에 사는 일본 사람들이 다 해일이 일어나서 죽게 됩니다.
복권을 사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니까 복권 1등이 1,000원짜리가 되어버립니다.

만일 우리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살 수 있다면 기도하는 성도가 왜 사업이 망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왜 병이 들고 왜 죽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서의 법칙 가운데다가 이미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면 받을 복을 다 입력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행함도 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초자연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보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 됩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망에 관한 이야기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준비를 항상 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천국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산다면 사람들이 이 세상의 성공에 대해서 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소망에 관한 대답을 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온유와 두려움은 누구를 향한 온유와 두려움이냐에 따라서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온유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경외로 해석을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고 대답하는 용어가 법정에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그 한 구석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과거를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소망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이 바라는 이 세상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에게 잘해주기 위해서 하늘나라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영원한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될 것입니다.

3.선한 양심을 가지라.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제일 우선이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할 것입니다.
내가 저 친구 잘 아는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천국에 간다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야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렇게 세상을 산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오실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고 거룩한 백성이냐 죄인들만 모아놓은 감옥 같다. 진짜 나쁜 사람들만 다 모여 앉아서 천국 운운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선한행위와 관계없이 천국의 가게 되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이런 비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살아온 배경을 바탕으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양심들이 다 선한 양심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고 훈련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면서 비웃으면서 살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이 선한 양심대로 천국의 복음을 이야기 하고 천국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그 소망대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은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게 하고 그 물음에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가진 사람답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따라 선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