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40)
본문 : 벧전 4:4-6
제목 :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인생을 좀 살고 보니까 가끔은 그동안 살아온 인생길을 뒤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아 내가 그때 참 잘 선택했다. 라는 것보다는 왜 그 때 그렇게 했을까? 지금다시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르게 안다면 누구나가 다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을 아무도 볼 수 없고 또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바른 길을 선택해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우리는 늘 이 길이 바른 길인가를 곰곰이 생각을 하고 선택을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다만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변수가 많은 길은 그렇다고 해도 아주 정확하게 정해진 길은 반드시 그 길을 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사탄을 따라 죽는 길이 있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살다가 다 죽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영원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이 참으로 중요한 길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길로 가야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닌 먼 훗날의 이야기 같기 때문에 당장 급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대강 적당히 살기를 원합니다.

두 길이 다 살기가 서로 비슷하면 좋은 길로 가겠는데 그 좋은 길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 사실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기저기 유혹의 손길도 많고 또 우리가 가는 이 길을 비웃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꼭 이 길로 가는 것은 이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못 가면 그 때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도 이 길을 가야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핵심이 그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극한 방탕의 길을 가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을 비웃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따라가야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이 길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에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라는 말은 바로 앞에 있는 1-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즉 우리가 이런 삶을 삶으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지만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이런 잘못들을 저지르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분명히 다른 것은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들처럼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극한“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자기 자신을 무모하게 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극한 방탕'은 자신을 절제하지 않으며 방종한 생활에 버려둠으로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사람들처럼 욕심도 있고 죄를 짓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절제하고 조심하고 정신을 차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사소한 잘못들은 저지르고 살지만 형편없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거나 강도짓을 하거나 아니면 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처럼 적당히 죄를 지으면서 적당히 즐기면서 살지 않느냐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마저도 뭘 그렇게 따분하게 사느냐고 비웃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인간이니까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것이지 뭘 그렇게 정확하게 바르게 살려고 하느냐고 우리를 비웃습니다.

예수천당, 예수천당 하지 말고 예수축복 예수축복하면서 살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이지 뭐하려고 그렇게 항상 십자가의 복음 천국복음만 외치면서 사느냐고 비웃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 조금씩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젊음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닌데 젊을 때 좀 즐기면서 살아야지 나중에 나이가 들면 후회하지 않을 까 걱정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 것은 그들이 이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도 만약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진리의 길을 바르게 안다면 그렇게 살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를 비웃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다고 해도 거기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더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생각해 보고 더 열심히 이 생명의 길 바른 길을 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심판대 앞에서 사실대로 고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5절 말씀에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든지 이 세상을 살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죽으면 그만이고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는 줄 알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고 그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을 낱낱이 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르게 살아야 흔들림이 없이 떨림도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 있게 자기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자신 있게 나는 이렇게 바르게 잘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로 예비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압니다.
그 심판장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심판을 준비하신 분이시니까 우리는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대를 준비하신 분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심판장으로 준비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일평생 믿고 따르던 그 예수님께서 재판장으로 서 계신 그 심판대 앞에 우리가 서면 우리가 얼마나 안심이 되며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려고 우리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그 분이 심판장으로 계시니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던 간에 깨끗하게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그 분이 심판장이시고 우리는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서 떨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시편 118편에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데 우리가 누구를 무서워한다는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까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 하나 신뢰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고관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고 고관을 신뢰하는 것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보다 더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다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앞서 살펴 본대로 흉악한 죄악에 달음박질하는 일은 없어야 될 것이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른 삶을 살아야 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일전에 사회복지사 의무교육을 받으면서 사회 복지사 윤리에 관해서 두어 시간 강의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윤리란 거짓이 없이 바르게 사는 것만을 윤리라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르게 정직하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서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윤리에 포함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백만 원을 받아서 조금도 부정함이 없이 백만 원어치 일을 하는 것이 우리는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끗하기는 하지만 윤리적으로 보면 100점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강사가 교회에 다니시는 사람인지 성경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준 돈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고 그것으로 두 배나 남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칭찬을 하시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람이 참 잘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괜히 장사한답시고 주인 돈 가지고 장사하다가 투자한 것이 잘 못되어서 망하면 주인의 돈을 돌려줄 수가 없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땅을 파고 묻어두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인의 평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일을 하기가 싫으면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아야지 땅에다가 묻어두는 것이 다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착하고 바르게만 산다고 그것이 바른 삶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재능을 주셨는데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그것으로 더 열정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보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부모님을 원망하고 삽니다. 
겨우 한 달란트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하느냐고 보무님을 원망합니다.
인물이나 잘나게 해 주시던지 머리라도 좋게 해 주시던지 그것도 아니면 돈이라도 많이 주시던지 어떻게 이렇게 못나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가지고 고생고생만 하게 하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보다도 더 열악한 형편에 태어났어도 열심히 노력하고 성공을 해서 부모님께 감사하며 효도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그렇게 처지를 한탄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원망만 하고 불평만 하면서 일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셨습니까? 그 한 달란트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그냥 이렇게 본전만 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렇게 원망하면서 사는 사람은 달란트의 비유대로라면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사람입니다.
다행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니까 그럴 리는 없으니 안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시는 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삶을 고하게 될 때 이왕이면 더 열심히 더 많은 일들을 해서 더 많은 칭찬을 받으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름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초라한 것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달란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땅에다가 파묻어두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또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별 볼일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큰일들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본문 6절 말씀에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죽은 자들이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 때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나 죽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 살다가 죽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사람으로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되나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을 따라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복음이 죽을 사람들에게도 전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게 하기 위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전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영원히 영생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앞에는 다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멀리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보면 잠깐의 세월입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죽음 뒤의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의 복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믿고 따르고 그 복음을 전하면서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비록 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그들처럼 살다가 죽지만 우리는 그들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비웃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그들처럼 극한 방탕의 길로 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최후의 심판이 준비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심판을 우리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심판장이 되신다는 것도 압니다.
그 심판대서 의인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따르며 오히려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을 믿고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