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04)
본문 : 벧전 1:5
제목 : 구원을 얻기 위하여.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몇 개 나옵니다.
“말세“라는 말과 ”구원”이라는 말 그리고 “믿음“이라는 말이 기독교의 핵심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구원”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에서 정말로 중요한 핵심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했습니다.
얼른 제목만 들으면 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일이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실 모양이다. 라고 생각을 하기 쉬운 제목입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이 되시는 분이 계시면 오늘 설교를 더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무엇을 행함으로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언제나 구원하신다로 씁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을 우리 인간과 관계해서 쓸 때는 언제나 얻는다, 혹은 받는다. 로 씁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의 공로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가 그렇게 믿고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구원을 어떻게 받게 되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기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구원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쓰이는 말입니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구원투수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공을 던지는 투수가 던지다가 힘이 빠지거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잘 던지는 투수가 대신 나와서 위기를 모면하게 해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을 구원투수라고 합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빚을 많이 지고 빚쟁이들한테 쫓겨 다니는데 어떤 사람이 그 빚을 다 갚아주고 잘 살게 해 주었다면 그 고마운 사람이 나를 구원해 준 사람입니다.

내가 불치의 병에 걸렸는데 특별한 약을 소개해 주어서 그 약을 먹고 낫게 되었다면 그 약을 구해다 준 사람이 나를 구원해 준 사람입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물에서 건져주었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구원자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라는 말은 내가 어려움에 빠져서 나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나에게 도움을 주어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을 때 구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죄 값으로 죽고 멸망하게 되었을 때 그 죄의 형벌에서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그 어려움을 헤쳐 나올 때도 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하고 병들었던 몸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실패만 하던 인생이 성공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궁극적인 구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느낄 때는 그런 것들이 참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시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구원을 어떤 때는 이미 받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우리가 지금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으로 말하기도 하고 오늘 본문처럼 미래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인지 아직 받지 못한 것인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완성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혼동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형으로 쓸 때는 즉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는 구원이 이미 우리 속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직 구원이 완성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구원 받을 사람으로 확정이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 세상 사람들과 외형적으로는 별 다른 것이 없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점점 자라고 점점 거룩해 지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신앙이 성장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하고 고행을 하고 덕을 쌓아서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점점 더 성숙해지고 점점 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은 미래에 완성이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하는 단어들의 시제는 다 미래형입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이 세 마디가 다 미래에 되어 질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원은 말세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물론 말세 즉 종말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사이라고 말합니다.
말세는 이미 시작이 되었고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종말을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말세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하도 악하니까 사람들이 말세다, 말세다. 라고 하지만 아직 세상이 끝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머지않아 곧 세상의 종말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아직 세상의 끝은 아니고 이렇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이 세상의 끝이 오면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망하고 소리를 지르고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는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기뻐 춤을 출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타내기로“라는 말씀도 역시 미래형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외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사람들은 항상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구원보다 더 좋아합니다.
우리 속담에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에 어떻게 되는 것 보다는 우선 입에 달콤한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구원의 모습이 확실하게 나타나면 아 나의 구원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좋은 구원을 미처 몰랐구나, 라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몰라서 구원 그런 말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먹을 것이라도 많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부자로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완성이 되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성이 되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완성이 되어 나타나면 지금 우리의 원망과 불평 욕심들이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비하신”이라는 말도 역시 미래를 향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주시려고 준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 절 4절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가 가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을 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산 소망은 우리가 잇게 될 영원한 기업은 말세에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지금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에게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시고 예비 하시고 간직하고 계시다가 세상 끝날이 되면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실 것입니다. 

2.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거나 고행을 하거나 수도를 하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충성을 하거나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거나 종교적인 열심을 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믿음을 통하여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서 즉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배우면서 철저하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배웠습니다.

바울은 확실하게 믿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고 우리의 선한 행위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고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역시 같은 복음을 전했고 믿음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사도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바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만 다르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같았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교제의 악수를 나눈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베드로의 사이에 약간의 견해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다 같은 유대인이었고 과거에는 두 사람 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데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진리를 알고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배제하고 오직 믿음만을 주장했지만 베드로는 복음에 대한 조금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니까 살짝 자리를 떠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죄입니다.
믿음으로 보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조끔 흔들린 것 같습니다.
그냥 이방인들과 식사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면 누가 보든지 말든지 오든지 말든지 그렇게 같이 식사를 했으면 될 텐데 본부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니까 식사하던 자리에서 얼른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적으로 따지면 새까만 졸병인 바울이 대선배인 베드로사도를 책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말이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포를 했으면 그대로 행동을 하면 되지 유대인들이 온다고 식사를 하다가 말고 도망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고 책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오랜 세월동안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고행이나 선행을 엄청 좋게 여깁니다.
그래서 목사가 늘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라고 해도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사님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착하게 살고 좋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이 믿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요 착하게 살겠다는 데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겠다는데 제가 그러지 말고 나쁘게 사십시오, 죄 지으면서 살아도 됩니다. 선한 일 좋은 일 안 해도 됩니다. 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것 가지고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좀 받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검은 속을 이미 다 아시고 우리의 그런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의의 기준을 믿음이라는 아주 쉬운 것으로 해 주셨는데 왜 되지도 않은 어려운 길을 가면서 되지도 못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두 손 다 들고 하나님 저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도저히 제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구속자가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라고 외치시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1절 말씀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지 얼마나 잘났기에 그 은혜를 폐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어려운 길 불가능한 길을 통하지 않고도 믿음만 가지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뭐가 잘나서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방법은 절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자기를 나타내려고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쉽게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나는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구제불능입니다.
나는 구속자가 필요합니다.
나는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음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구원이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이 구원을 잃지 않고 살려면 즉 믿음을 잃지 않고 살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 믿음이 변하지 않아서 결국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믿음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소중한 줄로 알고 그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셨는데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면 그 삶이 늘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알고 그 믿음을 지키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믿음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애착심을 가지고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꾸 도와주고 싶은데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고 자포자기 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은 도와줘도 소용이 없고 도와주기가 싫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않아서 꼭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그 믿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과 아무렇게나 여기고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과는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세상에 어떻게 변하든지 세상에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해도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아직 나타나 있지 않고 말세에 나타나게 될 구원이지만 우리가 그 구원을 확실히 받을 것이며 그 구원이 엄청나게 좋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이 믿음을 굳게 잡고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