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1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10)
본문 : 벧전 1:17
제목 : 두려움으로 지내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과거에는 죄인임이 분명하고 선한 삶을 살지 못했던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이제 남은 생애는 정말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의롭게 선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우아하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이렇게 스스로 외쳐보면서 살지만 사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더 나쁜 짓만 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좀 거룩한 모습으로 좀 착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속에 있는 죄악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읽기에 따라서 참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편파적으로 안다고 좀 봐주시거나 넘어가시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너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라.

이런 내용의 말씀을 듣고도 여러분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야 이제 나는 죽었다.
예수님만 믿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행동을 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하니 큰 일이 났다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디에다가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가 되심에 그 중심을 두면 우리는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떻게 사는가를 두고 보시고 그 행위대로 심판을 하신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서는 정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에 중심을 둔다면 좀 안심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심판을 한다면 두려워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주석들을 찾아보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전자에 그 중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지만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데 무게를 두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후자에다가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심판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데에 무게를 두고 해석을 행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서신이 어영부영 사는 사람들에게 쓴 서신이 아니라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사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려고 고향을 떠나서 먼 이국에서 고생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똑바로 살아라, 행동을 바르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생하는 그들에게 더 위로의 말을 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안심을 시키고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이 말씀으로 경고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위로를 하고 싶습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따뜻한 위로와 힘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시면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외모로 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 하나님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의 헬라어의 원 뜻은 '얼굴을 보다'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파생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봐 주고 어떤 사람은 안 봐주고 그러시는 분이 아니시고 공정하게 대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에 빠지지 아니하시고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이 공평하지 못함 때문입니다.
똑같이 못살면 똑같이 못 먹으면 그런 스트레스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텐데 비교적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저 못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다 상류층 사람처럼 사는데 행복지수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그들은 다 같이 못사니까 행복하고 우리는 너무 잘 사는 사람이 많으니까 불행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같은 민주주의의 정치를 하고 있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겠습니까?
모든 일에 다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장치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공평한 장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차별 대우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는 가장 인기가 좋은 직업이 공무원이나 초등학교 선생님일 것입니다.
월급도 괜찮지요, 쫓겨날 염려 없지요, 일도 험한 일은 아니지요, 누구나가 다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되려고 하면 보통 머리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같은 머리 가지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 그 직업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이 동네 저 동네 다 가 봐도 제일 많이 있는 것이 아파트입니다.
그렇게 높은 층을 짓고 그렇게 많이 지어서 아파트를 부어놓은 것처럼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고 흔한 아파트 한 채를 지니고 사는 것도 그렇게 쉽지를 않습니다.

누구나가 다 가서 살 수 있도록 공평하게 해 놓았습니다.
인종차별을 합니까? 학별 차별을 합니까? 거기는 머리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누구나 다 가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아주 뚜렷한 차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돈입니다. 누구나 다 살 수 있지만 단 돈이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차별이 없는 공평한 세상 같지만 그러나 공평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면서 사는 것도 억울한데 만약에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도 불공평한 일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그런 외형적인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쁘다고 봐 주고, 잘났다고 봐 주고, 똑똑하다고 봐 주고, 돈 많다고 봐 주고 그러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공평하게 정말로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한번 정하셨으면 정하신 그 원칙대로 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돈 없다고 괄시를 받지 않고, 미련하다고 피해를 보지 않고, 힘없고 배경 없다고 소외를 당하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그런 나라가 우리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 하나님을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자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셔서 멸망에 처하기도 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심판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까지도 한번은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심판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0절에도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예 우리 성도들에게는 심판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받는 그런 심판은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7-18절 말씀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절 말씀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의 삶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형벌로의 심판은 이미 면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이미 우리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그런 죄인이니 의인이니 하는 심판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심판하시되 그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심판이 없다고 믿다가도 이런 말씀을 대하면 좀 흔들립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면서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라고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야고보서에 따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보다는 행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시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믿음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에는 그에 따르는 삶이 반드시 수반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한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믿음을 행동에 옮기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기 때문에 율법 하나하나 다 지켜야 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가 가진 양심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사람은 다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행함은 심판을 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고 심판을 면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함, 믿음 안에서의 행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오후시간에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2:6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행함은 “주 안에서 행함”입니다.
주 안에서의 행함이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거나 선을 행한다는 그런 행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두고 딴 길로 가서 행하라는 말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양심에 의해서 그들이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심판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이미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그 행함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 안에서의 행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저는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으시고 각 사람이 행한 행동대로 바르게 심판을 하시는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공평하심에는 아주 정확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주 뚜렷한 구별입니다.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구별이 된 것이기 때문에 누가 시비할 수 없는 구별입니다.
한 종류는 버림을 받은 이 세상 사람들이고 또 한 종류는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구별은 공평함 위에 있는 구별입니다.
그 구별은 누가 시비하거나 따질 수 없는 아주 확고부동한 구별입니다.
조건에 따라서 바뀌는 구별이 아니라 절대적인 구별입니다.

이 세상의 죄인들은 이 세상의 죄인들을 재판하는 기준에 의해서 아주 공평하게 재판을 하십니다.
그들이 잘났건 못났건 귀족이건 천민이건 구별이 없이 다 법대로 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특별 대우하는 것은 차별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꼬우면 그것이 억울하면 교회 다니면 될 것 아닙니까?
누가 교회에 오는 것을 막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에 온다는데 차별대우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녀노소, 빈부귀천, 어느 것 하나 차별이 없습니다.

얼마나 교회가 많습니까? 얼마나 전도들을 많이 합니까? 
이 교회 마음에 안 들면 저 교회에 가면 되고, 이 목사 설교 듣기 싫으면 다른 교회에 가면 되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으면 큰 교회에 가면 되고, 큰 교회에 가서 무시를 당하면 작은 교회에 가시면 됩니다.

이렇게 기회를 많이 주셨는데도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무슨 이유로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십자가의 복음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여 내치시겠습니까?
그러려면 처음부터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4.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 세상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서 살 본향은 이 세상처럼 짧고 유한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너무 두려움을 가지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짧은 세상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떻습니까?
사는 날 동안은 길고 지루하고 지겹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하룻밤 꿈과 같은 세상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그런 두려움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 심판날 받을 형벌을 생각하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없이 우리에게 잘해주시니까 때로는 하나님을 사람처럼 친구처럼 진짜 세상 부모님 대하듯이 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도 하셨고 우리에게 친구가 되신다고도 하셨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하기에는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전능하시고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깨끗하시고 우리가 감히 대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믿음의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일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을 외모나 어떤 조건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