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2. 광성교회 부활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절기 01)
본문 : 빌 3:10-12
제목 :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해마다 부활주일이 되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나도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런 기쁨을 가지고 참석을 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 부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부활은 무슨 부활 그냥 이 세상에서나 마음 편하게 잘 살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으로 오십니까?

부활의 확신과 그 기쁨으로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입니다.
이 부활장을 잘 읽어보면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고 그 당시에 현장에서 그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태반이나 살아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활을 합니까? 부활이란 없는 것입니다.” 라고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부활을 반신반의 하면서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나옵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수천 년이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고 또 과학문명이 엄청나게 발달하여서 과학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 일은 믿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이 귀중한 것을 제쳐두고 다른 것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야 하겠지만 오늘 특별히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이 부활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을 하고 확인을 하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부활의 권능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알고자 하고 믿고 따르고자 했던 일이 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면 이 일에 대해서 서로 아는 바를 증언했고 이 부활의 신앙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이 부활의 신앙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1)그들이 가진 신앙의 기초는 부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교회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들의 교주가 보잘 것 없는 죽음을 죽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자기네 목숨 보전에 급급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는, 그들은 남을 설득하여 그들을 따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앙의 교사로서의 사역을 계속하리라고는 엄두도 못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그들은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표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그들의 주님을 믿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한번 읽어보면 초기 교회의 설교에서 부활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에 못지않게 사도들의 서신서들에서도 부활의 의미는 중요하였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그 첫 장을 열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로 확인하고, 이어서 당신 자신이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5, 18).

2)그들은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시비를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게 아니라 다만 기절하고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죽기는 죽으셨으나, 부활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졸도하셨다가 다시 깨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비를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셨다는 것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여러 가지 증거들 중에서 특별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렀다는 것은 죽음의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상처에서는 피만 나오고 죽은 사람에게서 물과 피가 나온다는 것이 의학적 상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확실하다면 부활의 증거들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주일만 되면 살펴보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활의 증거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돌무덤의 인봉 (마 27:66)이 끊어진 사실이다. 
만약에 누가 일부러 이 인봉을 뜯어냈다면 엄청난 각오를 가진 사람이 한 짓일 것입니다.
이 일로 붙잡히게 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야 되는 두려운 일을 당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 몸이 잡힐까 두려워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피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쓸데없이 이런 일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척에 둔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하였는데, 만약에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의 주장은 누군가에 의해 금방 탄로가 났을 것입니다. 

셋째,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대략 1360-1800kg의 무게라고 한다)이다.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는데,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로마 병정들의 눈과 귀를 막지 않고서는, 이같이 큰 돌을 그들에게 들킴 없이 옮기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넷째, 로마 병정들이 도망 쳤다는 사실이다. 
만약, 빈 무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망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다섯째, 제자들이 무덤에 가보았을 때, 예수님의 몸은 온데 간데없고, 세마포만 그대로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쌓던 수건 또한 딴 곳에 개켜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 해갔다면, 그렇게 옷을 벗기고 또한 가지런히 정돈까지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섯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이 너무나도 많고 또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고전 15:1-8). 
단순히 눈으로만 목격된 게 아니라, 직접 손으로 상처까지 확인되고 (요 20:24-29), 
같이 식사도 하였으며 (눅 24:13-35; 요 21:1-14), 
다양한 시각에 여러 계층의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그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까지 나타났습니다 (행 9:1-9). 
그러므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자들에게서 있을 법한 무슨 집단 환각 증세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자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이 되지 않을 만큼 무시 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부활의 사건이 날조되어진 것이라면, 여자들의 목격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기록에서 삭제되었을 것입니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일곱 가지 사실 이외에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 이후 180도 달라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무엇보다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이를 증거 하려고 하였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 말고 과학적인 증거들을 요구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뭘 잘 몰라서 그런 것을 믿었지 요즘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정확한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누가 그런 것을 믿느냐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을 한다고 해도 이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또 과학적인 사실들이 우리도 부활을 하는데 있어서 비록 시체가 다 썩어서 없어지고 불에 태워져서 없어진다고 해도 그 육신을 다시 살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유전인자 같은 것이 있어서 믿을 수 없는 사실도 믿어지고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이 그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2.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목적도 부활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본문 11-12절 말씀에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짓을 다해서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대로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온전히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아직 되지 않은 일을 되게 하려는 사람처럼 최선을 다하여 그 길로 달려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사람이었고 영원한 천국에도 가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예수님처럼 부활시키는지 무엇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하는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시켜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께서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치 바울이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사람처럼, 부활의 확신도 없는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을 한 것은 정말로 그것을 몰라서 그것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활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다 알고 다 받아놓았고 이미 다 이루어진 일이지만 마치 아직 부활을 확신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간절히 그 부활에 이르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부활을 하되 더 좋은 부활이 있다고 믿고 더 좋은 부활을 하기 위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고난의 길을 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35-37)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평안한 삶은 포기하고 오히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고난을 자초하면서 살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더 나은 부활을 얻는 것이라고 믿고 더 고생을 하면서 살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활이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서의 삶이 너무나 좋은 것이기에 부활을 하기만 한다면 천국에서 살 수 있기만 한다면 거기서 문지기를 해도 좋고 심부름꾼이 되어도 좋고 무엇을 하면서 산다고 해도 좋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천국에서의 상급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좀 더 많은 칭찬과 상급을 받고 더 기쁜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도 참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위해서 애를 써 봤자 길면 100여년 축복 속에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사는 것은 끝이 없는 영원한 시간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짧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보다는 영원한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부활과 영생에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나도 부활할 수 있는가 나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수시로 점검을 하면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들도 그 부활에 이르려고 목숨까지도 바치기를 꺼려하지 않았으며 이왕이면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서 천국에서 더 많은 칭찬과 상급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그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3.우리도 부활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오늘날 우리를 비교해 보면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은 엄청나게 변질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에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고난을 당하기보다는 화려하게 멋있게 살기를 원하고 있고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것 보다는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고문이나 조롱이나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오히려 작은 상처에 가슴아파하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토라져서 교회에 안 나오고 자존심 상한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궁핍이나 환난이나 학대를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예수님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칼이나 톱에 잘려서 죽인다고 해도 신앙생활 하시겠습니까?

오냐 오냐 해 주고 잘 대해 주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 믿는 척 하지 정말로 이런 시험을 당하면 교회에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우리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시대에서 마음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행복한 시대에서 멋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면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고난의 길을 택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다시 십자가를 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고통을 당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화려하게 살려고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영광을 너무 누리면서 살려고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더러는 손해를 보면서도 더러는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을 더 크게 가지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꿩도 먹고 알도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천국에서도 잘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만 생각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세상이 일인데 두 가지 모두가 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에 불과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를 원하면 천국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면 천국에서의 영광은 멀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중요하게 여기면 천국은 소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100여년의 짧은 인생보다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나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에 대해서 구체적인 것 하나만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부활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은 거룩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부활의 신앙의 실천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섬겼던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토요일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의 주일을 지킵니다.
왜 안식일에서 주일로 바뀌었습니까?
주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도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의 부활을 중심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매주일 만날 때는 성찬예식을 거행했습니다.
매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잡히면 화형도 당하고 사자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기 모였습니다.
좀 더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먼 이국땅에서 나그네처럼 살기도 했고 깊은 산속에서 땅굴에서 짐승처럼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한편으로 부럽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한심하기도 할 것입니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참 한심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반은 졸고 반은 딴 생각하고 성의도 없이 감정도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스러울까요?

더 나은 부활을 위해서 목숨을 걸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부활의 날에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예배나 잘 드리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부활을 시켜주신다는 약속을 받아서 그 기쁨으로 여기 모여 있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그 부활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