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33)

본문 : 마 6:12

제목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전반부 세 가지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후반부 세 가지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후반부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우리의 육신을 위한 기도이고(일용할 양식)

나머지 두 가지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기도입니다.(죄, 사탄의 유혹과 악)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는 육신의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큰 문제이고 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 좀 더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참 중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 보다는 영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적인 문제는 이 세상에 국한된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과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기도는 죄의 문제에 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부분입니다.

 

 

죄에 대한 것은 영적인 문제로 구분합니다.

우리 육신이 죄를 짓지만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는가를 알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하면서 영혼이 육신보다 중요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티끌로 돌아갈지언정 영혼은 불멸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보석이라면 육신은 그 보석을 담은 상자입니다.

육신이 비단옷을 입었으나 영혼이 벌거벗었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겠습니까?

육신은 배가 불러서 살이 쪄 가는데 영혼이 굶어서 쇠약해지고 죽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이 있어도 죄 사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육신을 위한 양식이 창고에 가득하여도 그날 밤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불러 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나 주어서 잘 먹고 잘 살도록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미운 자식 밥 많이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밥만 주고 필요한 훈계를 주지 않는다면 불행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한 다음 반드시 이어서 영혼에 대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더욱 간절하게 죄의 문제와 악의 문제와 시험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1.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할 때는 죄악이라고 해서 하마르티아(ἁμαρτἰα)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은 양심이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고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보는 사람은 성경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 죄악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조금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죄는 이 죄악 즉 하마르티아(ἁμαρτἰα)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죄라고 할 때 조금 다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오페일레마(ὀφειλημα)라는 단어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다 같이 죄라고 번역을 했지만 이 단어는 빚, 부채, 채무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을 “우리의 부채를 탕감하여 주옵소서.”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갚을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을 행하는 자보다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훔친 일도 없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일도 없고 주일날 교회에 빠진 일도 없고 평생 말씀대로 잘 살았기 때문에 자신은 의인이라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죄악이라는 말보다 부채 즉 채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 대한 부채가 늘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은 빚을 더 많이 진 사람입니다.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은 더 많은 빚을 진 사람입니다.

키가 큰 사람도 빚을 더 많이 진 사람입니다.

머리가 똑똑한 사람도 더 많은 빚을 진 사람입니다.

집에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빚을 더 많이 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우리 인간들은 다 하나님께 천문학적인 엄청난 빚을 진 사람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사용한다면 그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쉽게 생각해서 지구가 아닌 달이나 다른 별에서 산다면 그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햇빛처럼 큰 열기구를 만들고 공기도 만들고 환경도 살 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면 하루 생활비가 엄청나게 들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가 좋은 지구에서 살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너무나 좋게 살 수 있는 것인데 아무도 그 고마움도 모르고 그것을 하나님께 진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쌀을 돈 주고 사 먹으니까 빚이 없다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쌀값은 농부가 수고한 수고비만 주는 것이지 거기에 내리는 비의 값 공기 값 태양 사용료는 하나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수천 년을 살면서 땀을 흘려 일을 해도 그 빚을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살면 살수록 더 빚만 늘어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2. 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이 더 간절하게 기도를 할까요?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알수록 더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악하고 추한가를 알지 못하면 대강 용서해 주시려면 해 주시고 말라면 마세요. 라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파산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바르게 살지도 못하고 빚도 엄청나게 진 빚쟁이들입니다.

 

 

이번에 목회자 훈련원에서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혁주의에 속한 교회이고 여러분의 목사는 특별히 개혁주의 목회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타락한 중세 로마 카토릭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개혁해서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올바른 신앙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더 나아가서 루터파보다 더 확실하게 개혁을 하고 알미니안 주의자들과 구별을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과 구별되는 것은 구원에 관한 교리에서 그들과 다른 성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칼빈주의 5대교리가 있는데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잘못된 구원관에 대항해서 만든 교리입니다.

 

 

그 교리에서 첫 번째로 서로 대항이 되는 것은 인간의 죄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칼빈주의는 전적인 타락을 말하고 알미니안주의는 그렇게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칼빈주의는 즉 우리 개혁주의는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육삼빌딩 옥상에서 떨어진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살아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타락을 해서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2-3층에서 떨어진 사람정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치기는 많이 다쳤어도 꼭 그렇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만하면 스스로 살아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면 의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말씀만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주의자들입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타락한 인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 다니는 바른 성도라고 한다면 자신이 육삼빌딩 옥상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도저히 회생할 수 없이 죄악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을 개조시켜서 훌륭한 사람 충성하는 성도로 만들기에 급급하여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악의 심각성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이고 빚은 최악의 죄입니다.

우리는 지불을 할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빚을 갚을 수가 있다면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빚진 자의 비유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평생을 벌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우리의 빚은 단 하나 밖에 없는 빚이 아니라 다중적인 빚입니다.

시편 40:12절에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 이다."(다윗)

 

 

우리는 우리의 모든 영적인 빚들을 세느니 보다는 차라리 바다 속에 있는 모든 물방울을 세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빚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빚은 사람들이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증인이 없거나, 채권자가 증서를 잃어버렸을 때나 다른 핑계로 빚이 없다고 잡아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과 우리 양심의 책은 일치하기에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빚은 세상의 감옥과 비교할 수도 없는 지옥의 형벌로 데려갑니다.

세상의 빚은 갚을 수도 있고 감옥에 갔다 오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하나님께 진 빚은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악질적인 채무자에 속합니다.

없어서 못 갚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채무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갚으려는 생각도 않는 악질적인 채무자에 속합니다.

 

 

계산하라 청산하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런 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채무자인 인생들에게 계산을 요구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빚의 청산의 날 즉 심판의 날에 대하여 듣기 싫어합니다.

설교자들도 이런 설교를 회피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빚진 자이고 죄인이라면 그 빚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빚진 자로서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 다닌 지 몇 십 년 되었다고 자랑하는 순간에 개혁주의자에서 제외 됩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헌금을 많이 해서 주일을 잘 지켜서 복을 받았다 고 하는 것도 개혁주의자들이 할 말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죄인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나 되게 해 주셨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빚을 탕감 받는 어떤 길이 있다면 그 방법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 방법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죄 사함을 받도록 빚에 대한 탕감을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3.죄 사함을 받는 것은 매우어렵지만 우리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빚을 갚거나 탕감을 받는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받는 것과 죄 사함을 받는 것 어느 것이 쉽겠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받는 것과 내게 있는 것을 없애는 것과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여기 컵에 물이 있습니다.

이 컵에다가 설탕을 넣는 것은 참 쉬운 일입니다.

그냥 집어넣으면 달콤한 물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물 컵에 농약이 들어 있는데 그 농약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물을 다 버리지 않는 한 농약만 분리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면 우리가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을 제거하기란 우리를 죽이시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육신을 벗어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한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면 살수록 그 빚은 늘어날 뿐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만 가능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채주가 되시기 때문에 탕감해주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탕감을 해 주셔도 되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의 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치러주심으로 탕감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 길은 불가능한 길입니다.

아무리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죄를 용서받을 길은 없습니다.

 

 

단 한 길 날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는데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아멘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조금 나은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 중에 극히 일부 사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둑이나 강도나 살인자들 중에는 가끔 선한 일을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복지 시설에 기부를 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나 강도죄가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가 진 모든 부채를 탕감 받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받는 죄의 용서는 우리의 죄악을 완전히 제거해 줍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덮어줍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말소해 버립니다.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 넣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용서 완전한 탕감을 받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란 악이요 악덕채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죄인이요 채무자라고 했습니다.

이 죄를 그대로 두고는 이 부채를 그대로 두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우리 성도들은 이 죄 사함을 받는 길, 이 부채를 탕감 받는 길을 알고 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의 부채가 탕감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흉악한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이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어떤 일이 있어도 혹 일용할 양식은 주시지 않는다고 하리라도 꼭 이 죄 사함을 받게 해 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