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 광성교회 맥추감사주일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절기1201)

본문 : 고전 1:4-9

제목 :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감사는 관계회복이나 관계 유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감사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거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점점 미움을 받게 됩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미국에 더러 가는데 가면 안 나오려고 합니다.

거기가 좋다고 한국에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물론 환경들이 좋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미국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땡큐 땡큐 하면서 감사를 표합니다.

동양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촐싹거리는 것 같고 가식적으로 마음은 없으면서 인사치례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본적으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부모님이나 자식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렇게 좋은 관계가 남보다 못한 원수 같은 관계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거나 그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 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못해주는 것만 가지고 불평을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가깝고 좋은 사이가 남들보다 못한 사이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당연하게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감사하다고 표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제대로 다 안다면 우리는 늘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다 알지 못하니까 조금만 서운한 것이 있어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의 미움을 받게 되고 자신들이 받은 복을 스스로 차버리는 것을 많이 봅니다.

심지어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구원해서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해 주는 그 여정에도 물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 이런저런 불평을 하다가 가나안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는 범사에 항상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세상이 그렇게 감사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조금 좋아서 기뻐하고 감사하려고 하면 금방 어려운 일이 생기고 원망거리 불평거리가 생겨나니까 감사할 겨를이 없어집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꼭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따라와서 감사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교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항상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이 상존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좋은 일만 있어서 즐거워하고 어떤 사람은 늘 불행한 일만 있어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불행한 일도 있고 행복한 일도 있지만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불행한 일만 바라라보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일도 더러 있지만 그것은 보지도 않고 찾지도 않기 때문에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감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불행한 일의 원인을 늘 남에게 돌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있지만 늘 행복한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한 마음으로 삽니다.

이런 사람은 늘 입에 감사가 가득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늘 다른 사람들 덕분이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꾸어서 말씀을 드리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씀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란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의 형편도 다 엇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에 특별히 불행하거나 특별히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무엇을 더 보면서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불행한 현실보다는 우리가 가진 복된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사도바울의 감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실 당시의 바울이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형편을 살펴보면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거나 감사를 할 만한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감사를 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의 감사로 삼고자 하는 것이 오늘 제 설교의 목적입니다.

 

1.참된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 5절에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여기 언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언변이라는 말 보다 "교리" 혹은 "진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지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그노세이"(γνώσει)라는 말인데 바울이 쓰는 이 지식이라는 말은 세상의 잡다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서 3장 8절에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진리를 알고 교리를 바로 아는 것에 풍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지식에 풍족하기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진리를 알고 바른 교리를 알고 그 지혜가 풍성한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동하여 최고의 관심을 가져야 하고 중점적으로 배워야 하고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지식을 쌓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일까 십사만 사천 명일까?

예수님이 어디에 재림하실까 우리나라일까 이스라엘일까?

666이라는 표는 무엇일까?

이런 이상한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알면 좋겠지만 이런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진 사람은 이런 것을 엉터리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사이비 이단에게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12월 25일에 태어나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냥 편의상 정해놓은 날입니다.

 

안식일을 왜 토요일이 아니고 일요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여 예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때문에 주일날 모이는 것이지 안식일이 토요일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이 중요한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상한 말을 가져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은근슬쩍 자기가 예수님이 되고 구세주가 됩니다.

 

여러분이 사이비 이단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예수님은 반드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아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성령님은 사람의 모습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빙자하기 뭐하니까 성령님을 빙자해서 자기가 보혜사 즉 성령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가 예순님이라고 하든지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사이비 이단이고 사탄의 부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1장의 전반부의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매 절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했습니다.

3절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4절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5절에도 “너희가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했습니다.

6절에도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7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라고 했습니다.

8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22절 이하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했습니다.

 

구구절절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서 문선명이를 따르고 정명석을 따르고 이재록이를 따르고 그들을 구주로 알고 따르지만 우리는 그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하고 큰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따르고 그들을 믿지만 우리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죄를 가진 한 사람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많이 배웠다고 석사 박사 학위가 있다고 머리가 좋다고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님을 받은 사람만 이런 지식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이런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소망을 가지고 살게 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아주 진지하게 아주 간절하게 소망을 가지고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오늘날 우리들과 다름없이 욕심이 많은 욕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성도가 된 후에도 자기의 이익을 찾기 위해 법정에서 고소를 하기도 했고 자기의 세를 불리기 위해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하고 파당을 짓기도 했고요 육체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음행의 사건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참된 소망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소망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욕망의 사람과 소망의 사람이 있습니다.

욕망이나 소망이나 비슷한 말이지만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구분을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사는 사람을 욕망의 사람이요 하늘나라를 위하여 주의 재림을 위하여 기다리고 사는 사람을 소망의 사람으로 구분을 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잘살아 보려고 좀 더 행복해 보려고 좀 더 재미있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고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지 않는 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런 욕심들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욕망에 상한선이 없다는 점입니다.

천석꾼이 되면 만석꾼이 되고 싶고 28평에 살면 38평이 더 부러워지고...

이런 우리의 욕심에 상한선을 좀 그어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도 얼마 이상은 가질 수 없게 하고 집도 40평 이상은 가질 수 없게 하고 교회도 정원이 있으면 큰 교회는 자꾸 큰 교회 지어서 수만 명씩 안모이고 우리 같은 작은 교회도 좀 올 것 아닙니까..

욕망에 상한선이 없으니까 끝없이 한없이 욕심을 부리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런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세상의 허망한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일장의 춘몽과 같은 이 세상보다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욕망의 눈으로 보면 오늘 우리의 삶은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여기 재벌도 없고 여기 하다못해 장관 자리 하나 차지한 사람도 없고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기준으로 하면 아직 우리는 실패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은 인생 우리와 함께 동행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꽉 붙잡고 하늘나라까지 무사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육신이 부활하거나 변화하여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참된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온갖 욕심들을 버리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께 책망 받을 것이 없게 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책망한다는 말은 비난을 하거나 나무라거나 탓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꾸중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비난을 받거나 잘못을 지적을 당하는 것도 참 미안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 어떤 때는 며칠을 두고 마음이 아프기도 한데 하나님께 꾸중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무섭고 떨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고 우리가 그 책망 받지 않을 자리에 서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남과 비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왜 누구는 부자인데 당신은 가난하냐고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왜 누구누구는 똑똑한데 너는 멍청하냐고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왜 누구누구는 효자고 공부도 잘하는데 너는 불효자이고 공부도 더 못하냐고 뭐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 비교를 당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점은 늘 꾸중을 듣거나 창피를 당하고 그래서 때로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으면 그것만큼만 하면 됩니다.

두 달란트를 받았으면 그것만큼만 하면 되고요

아침부터 온 사람은 아침부터 온 대로 저녁 늦게 온 사람도 그대로 다 인정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로부터는 비교를 당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하나니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굳게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비록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주안에 있기만 하면 어떤 일을 해도 책망하지 않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날 같은 것도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시고 책망하시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4.하나님과 교제하게 됨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연합하고 교통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서로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사람들도 교제를 할 때 신분이 비슷한 사람과 교제를 나누고 서로 교통을 합니다. 그러나 신분이 맞지 않는 삶과 상대를 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교제를 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뜻이요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로 인정을 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흉악한 죄인이었던 우리가 이렇게 영광스럽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이렇게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는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이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의 지식은 없어도 잔꾀는 모자라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하여 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이 짧은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이 이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것이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사람들에게는 비교를 당하고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고 인정하시고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와 교제를 해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감사를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