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2.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골30)

본문 : 골 3:22-25

제목 : 종들아.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요즘 갑을(甲乙)관계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회사와 회사관계 개인과 개인관계에 어떤 계약서를 쓸 때 편의상 한쪽을 갑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을 을이라고 표기를 해서 긴 명칭을 생략하고 쉽게 계약서를 쓰기 위해서 사용한 용어입니다.

편의상 ㅇㅇ주식회사를 갑으로 하고 ㅇㅇ상사를 을로 하여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하여 갑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을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 이런 계약을 체결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크고 강한 쪽이 갑이 되고 힘이 없고 약한 쪽이 을이 되기 때문에 갑을관계라고 하면 힘 있는 사람과 힘이 없는 사람의 관계를 지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비행기에서 대기업 임원이 여승무원에게 라면을 맛있게 끓이지 못하니 어쩌니 해서 시비가 붙었다고 합니다.

힘 있는 대기업 임원이 갑이 되어서 힘없는 여자 승무원 을을 부당하게 대우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대통령 미국 방문시 동행한 대변인이 여자 인턴사원에게 불미스러운 행동을 해서 국가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기도 갑을관계가 적용됩니다. 힘 있는 대통령 대변인이 갑이 되어서 힘없는 인턴직 여성인 을에게 갑의 힘을 이용해서 나쁜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 갑을관계가 너무나 뚜렷했습니다.

갑의 힘이 너무나 커서 을이 감히 갑에게 대항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을의 힘도 만만치 않아졌습니다.

약자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갑과 을의 관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과거에 부모와 자식 간의 간계는 부모님이 갑이고 자식들은 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식들이 갑이 되었습니다.

갑을 넘어서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과거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남편이 갑이고 아내가 을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내가 갑이고 남편이 을이 되었습니다.

갑을 넘어서 주인이 아닌 주님의 경지에까지 올랐습니다.

 

과거에 회사의 사장은 확실히 갑이고 종업원은 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종업원이 갑이고 사장이 을입니다.

종업원 무서워서 사업을 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는 것은 참 힘이 드는 일입니다.

오늘날 종이 어디 있으며 상전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다 평등한 시대에 사는데 종이 있다고 하고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설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효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진리이고 언제나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1.종들아(주인과 종은 항상 존재한다.)

오늘 본문 말씀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종이 있고 육신의 상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전이 있고 종이 있는 이런 제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 세상에 제일 나쁜 것이 신분의 차별일 것입니다.

상전이 있고 종이 있고,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힘 있는 사람이 있고 힘없는 사람이 있고, 잘난 사람이 있고 못난 사람이 있는 이런 신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제일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다면 이 세상은 다 같이 행복할 텐데 왜 이런 차이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 이 세상에 이런 제도를 만들어서 힘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었을까요?

성경에서 종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쓰인 곳은 창세기 9장에서입니다.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 이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함이 잘못을 해서 벌을 받아 그의 아들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게 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종이라는 말이 처음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 이미 종이라는 말을 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없이 종이 되라는 벌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는 좋은 것만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그 조화가 깨지고 평화가 사라지고 서로 다투고 서로 힘으로 경쟁하고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이란 타락한 인간들의 세상에 자연히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타락하여 조화가 깨지고 평화가 사라졌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강자가 생기고 약자가 생기고, 많이 가진 자가 생기고 가난한 자가 생기고, 서로 강자가 되기 위해서 서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싸우고 경쟁하는 사회에 자연히 주종관계가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할 때 이 세상을 완전한 세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의 악한 것들을 다 제거하고 귀신이나 병이나 나쁜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그런 행동들이 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편에 서셨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일들을 계속하셔서 이 세상에 사탄의 역사가 완전히 사라지고 질병들이 사라지고 가난한 자들이 부자가 되고 약한 자들이 강하게 되면 정말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완전히 다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시범으로 보여주시기는 하셨지만 이 세상을 완전히 고치려고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만 이런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하시는 것이었고 그것도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타락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는 지금도 이런 주종관계가 있는 것이고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더러는 상전으로 더러는 종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에 반기를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에서 그런 악한 것들을 다 없애버리시고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시지 않으실까? 라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받들어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들을 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많은 성직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 일에 참여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권력에 아부하는 집단으로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노동자들 편에 서서 기업주의 횡포에 맞섰습니다.

노동운동을 하게 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찾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많은 분야에서 자기의 권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 이 세상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사회가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많이 좋아지기는 하겠지만 완전하게 모두에게 공평한 사회가 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욕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한 다 공평하게 해 주신다고 해도 또 서로 싸우고 빼앗아서 빈부의 격차가 생기고 신분의 격차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는 언제나 주인이 있고 종이 있고 갑이 있고 을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2.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

본문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노예제도나 주종관계를 없애시기를 원하셨다면 이런 경우에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종들아 주인들 말에 순종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종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그런 나쁜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앞장을 서라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고 종들에게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나쁜 제도를 없애서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그 제도에 순응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처럼 하라고 하셨습니다.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종들이란 당시에 기독교로 개종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종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종들이란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교회에 왔을 때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이런 억울한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별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고 하시면서 설마 종으로 이 세상을 살라고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을 망하게 하든지 주인의 마음을 바꾸어서 자유롭게 풀어주게 하든지 아니면 종의 자리에 있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금도 그런 말씀을 하시 않으시고 오히려 그런 나쁜 제도로 생긴 주인에게 순종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이 실망을 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아 여기도 별 볼일이 없구나. 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떠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교회들도 교회 안에 있는 종들에게 자유를 찾아주기 운동도 벌렸을 것이고 교회 안에 종을 둔 주인들은 종들에게 자유를 주기 운동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 제도자체를 없애거나 그 제도에 불순종운동을 벌이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제도를 인정하고 그 제도에 충실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해를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성경에서 그런 신분의 차별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제도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과 욕심 때문에 형성된 그런 제도를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이 따르고 있는데 그런 세상에서 사는 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인도의 힌두교에는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아주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습니다.

브라만[神官], 크샤트리아[武士], 바이샤[庶民], 수드라[奴婢] 등의 4성(姓)으로 나누어지고 태어날 때부터 각 카스트에 속하면 죽을 때까지 그 신분으로 살아야 하고 그 신분 내에서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카스트 제도 같은 것을 옹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 평생 종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고 노력을 해서 주인이 되기도 하고 부자가 되기도 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3절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너무 불합리한 주종관계에 있어서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이 하고 사람 앞에서 하는 것처럼 겉으로만 눈가림식으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남자에게 주어진 것이 노동입니다.

땀을 흘려서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에는 게으른 자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잠언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6:6-8) 라고 했습니다.

또 9-11절에는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라고 했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서 일하는 척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기 싫어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노동력이 착취를 당하고 고통당하는 종이 생기기 때문에 각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다 잘 살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카스트제도 같이 눈에 보이는 신분의 차이는 없습니다.

특별히 종처럼 노동력이나 인권을 착취당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범죄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지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유가 있고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전과 같은 자리에 있기고 하고 어떤 사람은 종과 같은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상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실한 마음으로 주께 하듯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라

본문 24절에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비록 불합리하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한 그런 자리에서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하는 일만 주님의 일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내 자신의 일이거나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라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고 기죽이지 않고 바르게 교육하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 하나님의 일입니다.

종이 상전에게 하는 것 상전이 종에게 하는 것 모든 일들이 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때 그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그 일에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상은 이 세상에서도 주어집니다.

자신이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잘되게 해 주시고 장수도 누리게 해주십니다.

그런 것은 부스러기이고 정말로 큰 상을 주시는데 그 상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기업의 상”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상이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말합니다.

그 시민권을 소유하고 그 시민권자로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모든 권한과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주시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만 들어가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착하고 의로운 성품을 가진 자들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좋은 성품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아직까지 죄악된 본성이 있어서 나쁜 생각도 하고 죄도 짓지만 그 나라에 들어갈 때는 완전하게 성화되어서 영화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급을 기업 또는 유업이라고 하시는 것은 이 상이 아주 특별하게 주어지는 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없이 부모님에게 유산을 받는 것처럼 은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상은 주었다가 빼앗았다가 하는 상이 아니고 한번 정해진 자에게 꼭 주시는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우리에게 꼭 주시고 은혜로 거저 주시고 영원토록 누리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 혹은 유업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귀한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하나님나라 너무나 좋고 완전한 나라를 기업 혹은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지만 이 세상에서는 종으로 살기도 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짧은 세상 나그네와 같은 세상입니다. 어떻게 한들 못살겠습니까?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살면 금방 좋은 날이 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종이나 상전이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어떤 형편이든지 모든 일에 우리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다 보상을 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는 것이 기업으로 유업으로 보장이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면서 사시면 하나님께서 충분한 보상을 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마시고 모든 일에 힘을 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