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2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06)

본문 : 행 1:4-5

제목 :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친히 살아나셨음을 확실한 많은 증거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이 40일의 기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40일 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하나님나라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40일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이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40일 동안 분부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이 되었고 그 때에 분부하신 것이 교회의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냥 사도행전의 서론쯤으로 생각하면 그냥 읽고 넘어가도 될 부분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예수님과 함께한 마지막 40일 동안의 일이기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들이 함께 모이는 일이고 함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명령을 듣는 일이고 그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모이사

오늘 본문 말씀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함께 모이사”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날리조(συναλίζω)라는 단어입니다.

“함께”를 뜻하는 쉰(συν)이라는 단어와 “모으다”를 뜻하는 할리조(ἁλίζω)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함께 모였다는 의미보다는 누군가가 불러 모아서 함께 모이게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모으셔서 그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쉬날리조(συναλίζω)는 “함께 식사하다”로 번역이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 이 부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잡수실 때에”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함께 모일 때 함께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중요한 모임이며 친근감을 나타내는 모임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사람에 따라서 차나 한잔 합시다. 식사나 한번 함께 합시다. 술이나 한잔 합시다.라고 하면서 친근한 모임임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함께 모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쉬나고게(συναγωγή)라고 하는데 이 말도 “함께 데려옴”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약의 교회를 헬라어로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도 집회나 회합 그리고 모인 무리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교회는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을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함께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어리석은 인생들 속에 살아가던 우리들을

밝은 빛과 같은 진리가 있는 곳으로

참된 인생 참된 삶의 의미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곳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가게 하는 곳으로

불러주셔서 이렇게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우리함께”라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깨닫습니다.

“우리 편”이라는 말과 “함께”라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저에게는 저를 정말로 사랑하셨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저의 이름 앞에다가 항상 “우리”라는 말을 붙이셨습니다.

“우리 행모”(저의 어렸을 때 이름이 행모입니다)

어디에 가시던지 저를 가리킬 때는 그냥 행모가 아니고 항상 우리 행모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가면 아 네가 “우리행모”구나 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라는 말은 어디에 붙여도 좋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들 우리 딸, 우리 동생 우리 형님,

우리 교회,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 우리 하나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렇게 우리라는 말을 쓰도록 하셨습니다.

 

가끔 성도들이 기도할 때나 이야기 할 때 우리교회라고 하지 않고 광성교회나 혹은 이교회라고 하면 저는 좀 섭섭합니다.

그 사람이 아직 우리와 함께 한 식구가 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다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교회가 더 부흥하지 않는 것도 이 교회 사람들 때문이고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다 우리성도들입니다.

특별히 우리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다 우리성도들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함께 나누고 상을 받을 일이 있어도 함께 받을 우리들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책임을 지고 뭐든지 연대해서 함께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함께 모이면 함께 식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모이실 때는 식사하는 자리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린 그림 중에도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이 매우 유명합니다.

그런 그림이 있다는 것은 늘 그런 식사모임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초대교회 때도 성도들이 주일마다 모일 때 늘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성도들은 늘 먹고 마시는 일을 함께 해야 하지만 흩어져서 살 때는 각자가 먹고, 먹을 것이 없거나 주일날이 되면 함께 모여서 식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삶에 있어서 먹을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이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주고 서로 먹고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힘이 들 때 하는 인사가 식사하셨습니까? 아침 드셨습니까? 하는 것이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꼭 그냥 보내지 않고 밥이라도 지어서 먹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심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일마다 식사를 함께 하고 또 따로 하는 것이 성찬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성도들은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얻는 특권입니다.

육신의 양식이 없으면 죽는 것처럼 영의 양식이 없거나 잘못된 음식을 먹으면 죽거나 병들게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 영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모임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여 모이는 모임입니다.

오늘 본문에 모인 사도들은 같이 모일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격도 각각이고 사는 방법도 각각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어부로서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어부들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기에 그들에게 세금으로 갈취를 하던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었고

셀롯인 시몬과 같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열했던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어부들은 세리와 같은 사람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틈만 있으면 와서 세금이라고 돈을 빼앗아 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 당원이었던 시몬도 세리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남들은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세리는 나라를 빼앗은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어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교회의 구성을 보면 정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과 종이 함께 모였습니다.

당시의 종과 주인은 사람과 농기구와의 관계였습니다.

서로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사람과 짐승과의 관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사람과 무식한 사람 달라도 엄청나게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것도 한 형제자매로 한 몸으로 서로를 대하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일 때마다 함께 식사를 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사이는 한 식구를 의미하고 함께 생명을 나누는 사이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하면서 우리가 다 같은 한 식구요 한 몸이며 함께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 그만그만하고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우월감 때문에 혹은 자기의 열등감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설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불쌍한 죄인일 뿐입니다.

다 함께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같은 능력을 가진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좀 달라 보여도 너무 다르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 무기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이 귀한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오늘 본문 말씀에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서 분부하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제자들은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분부하다는 말을 쓰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좀 다른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헬라어 파랑겔로(παραγγέλλω)를 “분부하여 이르시되”로 번역을 했는데 이 말의 뜻은 파라(παρα)라는 말과 앙겔로(αγγέλλω)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곁에 와서 말하고 알린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다정하게 특별하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만 하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매우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까지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자기의 경험이나 자신이 깨달은 철학을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는 재미있지만 그것이 소중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적적인 일을 체험했고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일 뿐이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만이 알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세상 이야기가 아닌 영원한 천국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곁에 오셔서 다정하게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한 귀한 말씀들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믿음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율법적인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술 담배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술이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고 담배가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모르고 우리에게 그러는 기쁨을 빼앗아가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술 한두 잔 즐기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인 너무나 많습니다.

어쩌다 한번 마신 술 때문에 실수를 해서 어렵게 쌓아온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려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 재미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술 담배 노름 마약 오락 이성 관계 욕심 이런 것 때문에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중독까지 안 돼 조금씩 즐길 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금씩이야 어떻겠습니까?

그 조금씩이 자꾸 중독이 되게 하고 우리를 망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또 듣기 싫은 말이 주일을 지키고 예배에 빠지지 말고 참석하라는 것과 헌금하라는 말과 헌신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는 것만큼 더 큰 은혜의 통로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일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고 보람 된 일을 하면서 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신앙을 지키게 하고 더 큰 복을 받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앞서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특별하게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 시작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 때는 특별한 현상들이 그들이 보고 알 수 있게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그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 각 사람에게 처음 임하셨을 때는 그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믿게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이런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불이 임하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렇게 임하신 성령님께서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복음을 알게 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할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모든 사람에게 오셔서 내주동거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특별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별한 느낌도 없이 성령님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아직도 성령님이 오시도록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그 때 이미 오셨고 지금은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으로 오셔서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이렇게 교회로 불려 나오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받아야 할 약속의 말씀은 성령님에 대한 약속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미 받은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오늘날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그런 기적적인 일들이 아니라 그런 은사들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시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받아야 합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다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심판의 날이고 이 세상 최후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날이 오지 않기를 그날이 아예 없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이 상급을 받는 날이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에 정말로 간절하게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서 이제 기다리다가 지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젠 믿음도 희미해지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 자체도 참 좋은 것입니다.

기다릴 것이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고 그것을 기다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모릅니다.

기쁨으로 그날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우리가 받을 상급들과 칭찬들을 기다리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이게 하시고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성령님이 오셨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성령님께서 오셔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이렇게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가 알아야 할 아주 소중한 말씀들을 매주 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잘 이해하게 해 주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늘 사모하고 들어서 복음의 진리를 더욱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따라 살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지 말고 우리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