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22)

본문 : 행 2:4-13

제목 :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입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쉬고 잠자는 집도 중요할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또 하나를 더하라면 언어생활이 참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만 준 최고의 선물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더라도 어떤 말을 하는가 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 잘하면 천량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잠언 25장 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라고 했습니다.

좋은 말 그 때 꼭 필요한 말을 쓸 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 한마디 잘 못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평생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을 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괜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말씀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처음 임하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들을 통하여 성령님의 오심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그 중 하나가 언어의 기적입니다.

 

신약교회 시대를 시작하는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못지않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 중요한 일이 시작되었으며 성령님께서 오셨으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려가지 특이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며 그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폭풍이 몰려온 것도 아닌데 소리만 그렇게 났다는 것은 자연현상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이런 바람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의 위에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불도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타지도 뜨겁지도 않은 하나님께서만 보여주실 수 있는 불이였고 불 역시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 현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현상은 각 사람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쓰던 언어와는 다른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한국말로 하면 듣는 사람도 한국말로 듣는 것이 언어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우리가 지금까지 쓰던 언어와 다른 언어였는데 내가 한국말로 하는데 미국 사람은 미국말로 일본 사람은 일본말로 들리는 그런 특별한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의 내용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성령님께서 오실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언어를 통해서 성령님의 임재를 보여주셨고 그 일을 본 사람들에게 일어난 반응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하신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본문 5-6절 말씀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건한 유대인이란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나라도 없고 살 곳도 없어서 여러 나라로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오시기 586년에 북 이스라엘에 이어서 남 유다도 바벨론에 함락이 되어서 나라가 망하고 말았고 그 후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 “천하 각국”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가 다스리고 있는 모든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는데 특별히 당시 로마가 다스리고 있던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흩어져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진 신앙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년 유월절이 되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오순절이 될 때까지 2개월 정도를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인지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겼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렇게 절기가 되면 먼 길을 마다않고 와서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고 아무리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도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역사의 현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큰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늘로부터 온 엄청난 소리에 놀라서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여 여기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히 그 자리에 있게 해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50일이 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기는 참 힘이 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월절만 지키고 가버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아주 악한 죄인들이 되어서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곧 시작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고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그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고 그동안 믿지 못했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바르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받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의 머리로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진리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복음의 의미도 알지 못하고 교회나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교회에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인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런 귀한 자리에 와서 예수님을 바르게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선택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본문 7-8절 말씀에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엄청난 소리를 듣고 소동을 하며 그곳에 왔는데 거기에 또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기 모인 제자들이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각자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말로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작은 나라이지만 각도 사람들이 특별한 사투리를 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어느 지방 출신인지 바로 압니다.

 

거기 모인 제자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고 그들의 행색을 보니까 공부를 많이 한 도시 사람도 아니고 별로 아는 것도 없어 보이는 촌사람들인데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촌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했을 리도 없는데 이렇게 유창한 외국어 솜씨로 그것도 한 두 나라가 아닌 15개 나라 혹은 지방의 사람들이 다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동쪽의 바대(지금의 중동) 서쪽의 로마(유럽) 남쪽의 애굽과 리비아(아프리카) 북쪽의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터키지역) 등 당시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던 여러 나라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살았고 그 나라의 언어를 모국어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거기 모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자기의 나라 모국어를 듣는 것처럼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면서 이 일이 사실이며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이 일이 신약의 교회를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이벤트를 하신 것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계통의 사람들이 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님을 받은 증거라고 주장을 하여서 우리가 혼란에 빠진 일이 있습니다.

 

방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매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방언을 받으려고 애를 썼고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엉터리로 가짜로 방언을 말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언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방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폼을 잡았고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무시를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에게 이상한 말을 배워서 그것을 방언이라고 자랑하고 자신이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뽐내기도 했습니다.

 

이상한 소리들을 방언이라고 해서 우리 기독교가 이방인 종교처럼 저급한 신비주의로 전락을 해버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주문을 외우고 이상한 짓을 함으로 기독교를 저급한 종교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의 방언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하고 확실한 방언은 오늘 본문처럼 외국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말을 분명히 하는데 일본 사람은 일본 말로 미국 사람은 미국말로 듣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말을 잘 해서 미국 사람이 그 말을 알아듣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한국말을 하는데도 미국말로 알아듣게 하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로서의 방언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병을 고치기도 하고 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영을 분별하기도 하고 예언을 하기도 하고 방언을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로서의 방언도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그 사용에 있어서 많은 제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천 마디 말하는 것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한마디 하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그 사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방언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의 방언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방언을 말하게 하고 방언을 말함으로 믿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방언을 말함으로 믿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고 방언을 말하지 않아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임재한 사람도 방언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따라 방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사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저의 오래 된 설교 가운데 “닭 울음소리를 듣고 사십니까?”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닭울음소리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길목마다 신호등을 켜 두시고 우리가 그 신호등을 보면서 바른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지 못할 때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 우리가 엉뚱한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호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 신호가 초자연적인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신호를 보고 믿음을 굳게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본문 11-13절 말씀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15개국 혹은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말은 각기 다 자기나라의 말로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반응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당황하고 놀라는 사람이 있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고 이 어찌 된 일이냐고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술 취한 사람이 헛소리 한다고 놀리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놀라며 당황하는 사람들은 그 말소리를 바르게 알아들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조롱하고 놀리는 사람들은 말소리를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놀라며 당황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을 말하는지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일을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또 포로생활에서 구원해 주시고 크고 작은 전쟁과 어려운 일에서 구원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일을 큰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큰 일을 말함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찬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편 112편에서 118편까지 또 그 외에도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들이 많이 있는데 그 시편들의 대부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들입니다.

그 시편의 시로 찬양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주제는 구원이고 그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소리를 바르게 알아들은 사람들은 아 이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구나, 이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그 구원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이 구원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때 이것을 본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고 구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할 때 우리를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보고 술에 취했다고 정신이 나갔다고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시끄러운 소리라고 못하게 합니다.

교만하게 자신이 잘난 사람으로 착각하고 앉았지만 사실은 성령님을 받지 못했거나 받았으면서도 그 성령님의 사역을 부인하고 아직도 자기 스스로의 의를 내세워서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방언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방언으로 자기의 욕심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렀을 때에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신약의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셨을 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습니다.

15개국의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특별한 언어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내용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찬양이었습니다.

 

그 성령님에 지금 우리에게도 와 계십니다.

옛날처럼 기적적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그 할렐루야의 찬양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언어에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날마다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을 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