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6. 광성교회 맥추감사주일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절기1403)

본문 : 렘 33:10

제목 : 다시 감사의 찬양이 들리는 곳에 있는 우리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남의 잘못을 고발하며 자기가 실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고 억압적인 정치를 했을 때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 독재에 항거하여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고발하여 민주주의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런 일 때문에 비판하고 고발하고 개혁을 하려는 세력을 민주주의자들로 인정을 하게 되고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이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이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고발하고 개혁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 없어지고 좋은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보고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비판하려고만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단점은 덮어주고 이해하고 장점을 살려주고 칭찬해주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가 신앙에까지 물드는 것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좋은 점도 있고 때로는 좋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볼 때때로는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점을 보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이고 좋지 않은 점만 찾아서 원망이나 불평을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보다 나의 잘못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내 눈에는 큰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작은 티끌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한 그 비판 때문에 나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이 더 시급한 일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34:2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의 초실절을 지켰습니다.

그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요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사도행전에 성령님께서 오신 오순절이 바로 그날입니다.

그 날을 우리가 맥추감사주일로 정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뻐하는 것이 감사절기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감사를 잃어버린 세상 사람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설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우리 인간들이 살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고 티끌에 불과한 우리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들을 세상의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영혼도 주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해 주셔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행복하게 살수도 있고 자유도 누리며 살 수 있는 이런 멋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리지 않고 오히려 원망하고 비웃고 사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자신의 참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정말로 살기 좋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고 자유롭게 살게 해 주셨는데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시고 그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는가라고 원망을 합니다.

 

천지를 만들어주신 것이나 인간 자신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없고 선악과 하나 가지고 그것도 자기들이 욕심 때문에 잘못한 것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하나는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

 

인간들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악한 길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을 하시고 그 선한 길로 인도하시면 우리는 순종하며 그 길을 따라 가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선하고 행복한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 사탄이 와서 유혹을 합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언제까지 남의 수하에서 시키는 대로나 하고 얽매어서 주인이 뭐라고 하면 예, 예하면서 굽실거리고 맨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인사만 하고 살래?

네가 주인이 되고 네가 대장이 되어버리면 뭐든지 네 마음대로 하면 되고 감사할 필요도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창조하시고 자신들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사탄의 유혹을 따라서 감사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 속하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탄이 제공하는 악한 길을 따르며 눈에 보이는 쾌락을 따라 살다가 영원한 멸망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길도 알지 못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악한 길이 선한 길인 줄 착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사탄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이상합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부모님이 안계시면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태어나서 자란 사람처럼 부모님을 원망합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이 세상을 삽니다.

나 혼자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사탄이 역사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주는 욕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 모든 사람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풍조가 교회 안까지 흘러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늘 원망과 불평 비판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감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잘못된 것을 찾아 비판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지만

성령님께서는 좋은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십니다.

비판은 나 자신에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사를 하게 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사람들

본문 상반 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멸망할 예루살렘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황폐하여서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라고 했습니다.

황폐(荒廢)라는 말은 집이나 땅이나 산들이 거칠어져서 못쓰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정신세계나 생활이 거칠고 메말라 갈 때도 황폐라는 말을 씁니다.

 

유다가 완전히 망하여서 유다 성읍이나 예루살렘의 거리가 사람이 사는 거리로 볼 수 없도록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이지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더 큰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선택을 하셨고 그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일을 진행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종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꿈꾸며 하나님을 떠납니다.

자유를 누리며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머리로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비참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자유롭게 더 행복하게 더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처럼 살아보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가 그로인해 아주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 이후에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비참한 상태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져서 처음에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버렸지만 나중에는 그러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위선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백성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선한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겉으로는 평안한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빼앗고 착취했습니다.

조그마한 권력만 있어도 그 권력을 이용해서 힘이 없는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그들을 부추겨서 괜찮다고 평안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평안한 삶을 살고 있고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 같은 거짓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제사의 의미도 모르고 제사 드려서 벌이나 면하고 복이나 받아볼까 하고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제사다운 제사는 한 번도 드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복을 받을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위선에 속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때로는 속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거짓된 제사와 위선적인 행동은 더 싫어하시고 오히려 벌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그들과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를 자주 드리고 선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복을 받을 줄로 착각하지만 오히려 더 벌을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예배가 심각할 정도로 형식적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복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쓸어 엎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가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배를 받으려는 사람처럼 교만하게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속으로는 원망이나 하고 불평이나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 잘 살고 더 행복해질 것 같지만 사실 그런 사람의 미래는 비참할 뿐입니다.

육신의 삶이나 마음이 다 황폐해져서 멸망의 길로 달려갈 뿐입니다.

 

다시 감사의 찬양이 들리는 곳에 있는 우리들.

오늘 본문 하반 절에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아주 괘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가 너무나 악해서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몰라서 우상을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처럼 행동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거의 다 멸망시키셨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성전까지도 완전히 불살라버리셨겠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 앞에서 위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기 때문에 불살라버리신 것입니다.

 

그 정도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들을 돌볼 마음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봐주려고 해도 어느 정도 동정의 여지가 있어야 봐주는 것인데 악해도, 악해도 너무나 악한 사람들을 다시 보기도 싫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해 주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완전히 황폐된 거리에서 너무나 완전히 망해버렸기 때문에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절망의 거리에서 다시 기뻐하는 소리가 나고 다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소리가 들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이 회개하고 깨닫고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게 될 것이고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여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황폐된 도시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이 돌아와서 다시 선전을 짓고 성벽을 쌓고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실 일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을 다시 회복 시켜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성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자리에 와서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며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이렇게 좋은 자리 즉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의 소리가 들리는 이 자리에 서게 해 주셨음을 알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1)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엄청난 을들을 행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의 역사가 지금 저와 여러분을 이런 뜻 깊은 자리에 서서 복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고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을 일이며 기뻐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직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죽겠느니 살겠느니 하지만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는 너무나 커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기뻐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힘들고 어려운데 기뻐할 일도 없는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남은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기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고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인자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화려한 삶도 살았지만 엄청난 고통도 당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오해도 받고 배반도 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6-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맛을 보아야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피해보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고 하나님께 호소해 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인데 자기 스스로 자기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더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3)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 줄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고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여기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보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 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얼마나 뜨겁게 감사하는가, 얼마나 감격스럽게 찬송을 부르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진실 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그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처럼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닌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위선자는 아닌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아는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런 복된 자리에 보내주셨음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