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1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27)

  본문 : 행 2:25-28    

  제목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25.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요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이야기를 듣기 싫어합니다. 

  “왜 우리 목사님은 고리타분하게 맨날 성경이야기만 하는지 모르겠어, 재미난 이야기도 많고 또 유익한 이야기도 많은데 하필 성경에 등장하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나 하고 우리나라도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나 이야기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어.”라고 합니다.


  그것을 눈치 챈 목사님들은 설교를 하면서 성경 이야기를 잘 안합니다.

  본문만 읽어놓고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잘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재미있어할까?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웃길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설교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산 속에 들어가서 5년 동안 기도를 하면서 성경을 읽고 깨달은 것이 사람들을 웃겨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오고 건강해지고 하니까 어떻게 하든지 웃기는 설교를 해서 복을 받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웃기는 것을 연구하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너무나 많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도 너무나 많이 엉뚱한 곳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한다면 제 설교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재미없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저는 제일 좋은 설교라고 자신 있게 하는데 듣는 여러분들이 제일 형편없는 설교를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약교회의 제일 첫 번째 설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가 설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큰 두 기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이시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주로 삼으셨다는 것과 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핵심이고 모든 성경의 핵심이며 우리가 전파해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설교가 재미가 있고 없고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웃기는가, 울리는가 하는 것도 차후의 문제입니다.

  구성이 잘 되어 있는가, 설득력이 있는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가, 이런 문제도 차후의 문제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설교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가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 설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인 시편 16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 시의 고백이 다윗의 고백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고백을 미리 예언한 것이며 그 고백이 또한 우리의 고백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영혼과 육체를 죽지 않고 썩지 않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고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근거는 철저하게 성경말씀이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 말들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때로는 이해하기가 힘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할지라도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교회는 설교를 통하여 이 생명의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이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명을 길을 보고 그 생명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과 육체가 즐거운 길


  본문 26절 말씀에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지난주에 살펴본 25절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시인 시편 16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시16:9)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산다고 했습니다.

  마음과 영과 육체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늘 하나님을 보며 살았고 늘 우편에 계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고 그래서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도 기쁘고 영혼도 즐겁고 육체도 안전하게 살았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예수님에게 적용을 시켜서 예수님도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겁고 육체도 희망이 있다고 고백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하고 영혼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 같았고 육신도 죽임을 당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길을 알고 나면 이렇게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명의 길을 통해서 우리도 마음과 영혼과 육체가 다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세상적으로 출세를 했다고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그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울 때 우리의 육신도 건강해집니다.

  육신의 거의 대부분의 질병이 이 마음에서 오기 때문에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육신의 건강을 가장 큰 문제로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합니다.

  다이어트도 하고 운동도 하고 좋은 음식 가려먹기도 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 앞서서 마음이 평안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으면 그런 노력이 허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이 급격하게 약해져가고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망가지고 아픈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자세히 보면 마음도 아주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몸도 약해지고 더 빨리 늙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무슨 생각이 많이 날까요?

  나이 안 들어 보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옛날 생각을 많이 하십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옛날 살아온 이야기 들려주려고 합니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귀가 따갑도록 합니다.

  그런 이야기 자주 안하면 옛날이야기니까 다 잊어버릴 텐데 자꾸 반복하니까 잊어버리지도 않고 그대로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옛날에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입혔던 사람 나에게 못되게 대했던 사람 나를 도와주지 않은 무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주변의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주지 않아서 이렇게 산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다가 부모님까지 원망을 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마음이 옹졸해지고 조금만 뭐라고 해도 기분이 나쁘고 화를 냅니다.

  자꾸 사람들이 보기 싫어지고 잔소리가 나옵니다.

  옛날 나에게 잘못했던 사람들이 자꾸 생각이 나고 누가 인사만 안 해도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를 다 잊어버리고 현실에 만족하면서 현실에 충실하면서 살면 참 좋을 것인데 그렇게 살게 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원망하는 마음 다 버리고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면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마음을 넓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상태가 가식적이거나 형식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복음을 바르게 알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영혼이 잘 되고 건강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혼이 잘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복을 받는다고 영혼이 잘 되고 마음이 평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해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건건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우리의 뜻대로 모든 일을 다 만족하게 해 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도 내 뜻대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더 불평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왜 안 들어 주십니까?

  제가 하는 일이 못마땅합니까? 라고 불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흉악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흉악한 죄를 용서 받게 해 주시고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을 주셨다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해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평안하고 또 육신도 건강하게 사는 비결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구원의 길을 보는 것이고 그 구원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영과 육의 영원한 생명의 길


  본문 27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6:10절의 다윗의 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죽음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살리실 것이며 예수님의 육신도 죽음 가운데서 썩어지지 않도록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살리시고 예수님의 육신도 부활시켜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서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리심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고 우리의 육신도 부활하는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좀 더 오래 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영원히 사는 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영원히 산다고 말은 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냥 믿는 척하고 혹시 기대는 하지만 정말로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정말로 믿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고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안 하고 이 세상의 이야기만 합니다.


  사실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들 자신이 영원한 세상을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잡다한 세상지식이나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별로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또 지금 눈앞에 있지 않고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은혜를 베풀고 기적을 베푼 하나님보다도 우상을 더 잘 섬겼던 이유는 그 좋으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고 비록 나무로 만들었고 돌로 만든 것이라고 해도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 미래에 주어질 복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고 지금 준다면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목사들도 사탕발림으로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영혼이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우리의 육신이 멸망을 당하거나 썩어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고 우리의 육신도 부활하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주께서 내게 보이신 생명의 길


  본문 28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시편 16편 1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보았습니다.

  후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윗의 그 예언적인 노래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고 그 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소망을 주는 것도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고.

  우리가 정말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도 영원한 소망의 길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한 삶을 살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까하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엄청나게 살기 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쓰는 가전제품과 통신장비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차들을 보면 정말로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 가지고 계속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인권문제나 복지문제도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아졌습니다.

  우리 젊었을 때만 해도 정부에 대해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잡혀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놓고 대통령이나 정부를 비판하고 욕해도 잡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복지 문제도 아직까지 사각지대가 있기는 하지만 많이 좋아졌습니다.

  최소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최소한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지는 않습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 무상교육이고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가지는 않습니다. 장학금도 많고 융자도 많이 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불평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옛날보다 더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마음대로 말하는 세상이 되니까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사람들만 늘어납니다.

  아이들 언어들을 보면 놀랠 것입니다. 욕이 아니면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밥 먹고 살만하게 해주니까 더 게을러지고 더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자유롭게 살게 해주니까 자유를 가지고 남을 해치는데 사용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남을 해치고 죄짓는 것을 마음대로 합니다.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오히려 더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사람을 폭행하고 죽입니다.

  학교폭력이나 군인들의 폭력을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도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사람들처럼 살려고 합니다.

  세상 재미에 빠지려고 하고 나쁜 사람들을 따라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의 길을 볼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참된 기쁨의 길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길을 알고 그 길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생명의 길로 힘차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 길이 최선의 길이요 최고의 기쁨을 주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가 보여주신 생명의 길이 여기 있습니다.

  이 생명의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