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3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30)

  본문 : 행 2:37-39    

  제목 :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총알택시 기사와 목사님이 같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총알택시 기사는 칭찬을 많이 하시면서 목사에게는 한마디도 칭찬을 안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하나님께 섭섭한 투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그래도 저는 명색이 목사인데 저는 칭찬 한마디도 안 해주시고 어째 총알택시 기사만 칭찬을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야 너는 맨날 사람들 졸게만 하고 왔지만 이 총알택시 기사는 사람들을 깨워서 기도하게 만들었다. 라고 하시더랍니다.


  오늘도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면서 가끔 피곤해서 조시는 분을 생각하면서 아 나도 하나님 앞에 가면 성도들 졸게만 만들었다고 책망 받을까봐 걱정입니다.

  제가 설교를 별로 재미없게 하더라도 제가 하나님께 책망 받지 않도록 졸지 말고 열심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 우리 시찰회가 모여서 목사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어떤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좋을까에 대해서 토론이 있었습니다.    


  제자교육, 두 날개, 바이블 키, 등 여러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교육을 받기 싫어하고 교육을 받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로 시간을 내고 따로 모여서 성경공부하려고 하지 말고 주일 낮 예배라는 너무나 좋은 시간이 있으니까 웬만하면 그 시간에는 사람들이 다 모이고 그 시간은 귀를 기울여주니까 그 때 열심히 준비해서 부흥사경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예배도 교리나 성경을 가르치는 시간을 가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좋은 시간에는 설교준비도 잘 안 해가지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때우고 지나가고 나중에 또 따로 모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좋은 시간에 졸거나 딴 생각하고 지나가고 나중에 따로 모여서 공부하고 싶으십니까?

  우리교회는 따로 성경 공부하는 프로그램 많이 없으니까 주일 낮 예배 설교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일 낮 예배 설교 때 여러분이 듣고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진리들을 다 말씀드리고 있으니까 설교만 잘 들으시면 따로 공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 주무시는 분들은 따로 모여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꼭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저것 잡다한 지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꼭 알아야 할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이 너무나 좋아서 이런 말씀들을 드려보았습니다.

  설교자가 늘 이런 중요한 설교를 하고 청중들은 그 설교를 듣고 반응을 보여야 그것이 진짜 잘하는 설교입니다.


  청중들이 베드로가 하는 그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했습니다.

  매주 이런 반응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설교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리액션 스쿨에 한번 가야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말에도 이런 리액션이 있어야 그 말 하는 사람이 기뻐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리액션을 잘하면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청이 찢어지도록 부르짖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못하고 있든지 성도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감동이 없어졌는지 뭔가 이상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이런 감동이 있었던 중요한 대목이니까 설교를 잘 들으시고 우리도 설교를 들을 때 이런 마음이 생기도록 노력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본문 37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서 마음에 찔리는 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중에는 거기 이상한 움직임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따라오긴 했지만 왜 모였는지도 잘 모르고 사도들이 하는 말을 귀를 기울여서 듣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더러는 듣기는 들었지만 그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그 내용의 뜻도 알아듣고 그 내용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들을 때도 건성건성 듣지 말고 청종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심각하게 말을 하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나 딴 짓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가 되어서 어떤 집사님이 교회에 잘 안 나와서 심방을 간 일이 있습니다.

  전도사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종이 인사를 하고 들어갔는데 이 집사님이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고 텔레비전을 켜놓고 텔레비전 한 번 보고 저 한번 보고 그럽니다.

  저도 텔레비전 보는 것 좋아해서 이해는 하겠지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같아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남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좀 더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하지만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는 태도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저를 하나님의 종이라고도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자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라고 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이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왕명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사극 많이 보신 분은 사람들이 왕명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는가를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왕이 계신 왕궁을 향하여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왕명을 받습니다.

  비록 그 왕명이 사약을 내리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왕명을 받아야 합니다.


  매주일 왕명을 받으시느라 힘드신 줄 압니다.

  왕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시원치 않아서 그런 줄도 압니다.

  그러나 조금은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좀 더 진지한 자세로 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이 설교를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도 하나하나 잘 파악을 해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실 때 잠깐만 딴 생각을 하면 중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내용파악이 잘 되어야 그 의미를 알고 반응을 할 것인데 내용파악이 안 되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보면 어떤 때는 이 말씀 때문에 아무개 성도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조심스럽게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얼떨결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릴 때도 있습니다.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제 시험이 들어서 교회에 안 나올 수도 있겠구나 하고 걱정을 하는데 다행히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사를 하고 가고 다음 주에 또 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그 말 할 때에 공자님 만나고 온 것입니다.


  그런 실수한 말 안 좋은 말은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다행이지만 정말로 들어야 할 중요한 말까지 놓쳐버리면 그것은 큰 불행일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에 찔린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의 설교 전체가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36절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라고 하신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찔리게 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아느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너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이요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너희들이 못을 박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못이 그들의 가슴에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롱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니,

  우리가 흉악한 죄인 취급을 해서 강도와 함께 못 박은 그분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니.

  정말로, 정말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우리가 엄청난 짓을 했구나.

  후회와 죄책감에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 아파 하는 사람들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 나는 다행이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짓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천년 전의 일인데 저 중동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인데 우리는 그 근처도 못 가봤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들이 아니고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4-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았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나의 허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많은 흉과 허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마음이 아파본적이 없는 사람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제일 먼저 오는 것은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지만 배우지 못해서 남에게 많은 피해들을 입히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살고 싶고 존경받으면서 살고 싶은데 자랑할 것도 없고 잘한 일도 없어서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고 있는 나의 이런 허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살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살고 있는 나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며 썩어가는 세상을 정화시키면서 살아야 하는 그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한 나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몸 바쳐 마음 바쳐 충성을 다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쁘다 어렵다 이런 저런 핑계로 사명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사는 나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 때문에 나의 가족이 힘들어하고 나 때문에 나의 형제들이 힘들어하고 나 때문에 나의 부모님들이 고통을 당하는데도 나의 책임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사는 나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죄악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악한 생각들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욕심들 이런 죄악들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징계를 받을까봐 내가 채찍에 맞을까봐 내가 형벌을 받아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까 봐 예수님께서 나 대신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슴아파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감격도 없습니다.


  매주 이런 설교를 했는데도 가슴아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교를 잘 안 들어서 그런지 내용 파악이 잘 안 돼서 그런지 알면서도 믿을 수 없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설교를 잘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알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슬퍼할 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본문 37절 하반절 말씀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하는 말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깨닫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잘못을 깨닫고 가슴 아파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다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를 질문하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아 큰일 났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식구 중에 사고가 나서 다쳐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 가슴 아프다 큰일 났다 이러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얼른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지 못한 엄청난 일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면 어쩔 줄 모르고 구경만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때도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 때 그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고 라는 질문 앞에 서서 신속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대형사고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엄청난 잘못 앞에서 그러면 내가 어찌할고 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박에 짐을 너무 많이 실었어 이렇게 가다가 위험해 그러면 내가 어찌할까 잘못을 말하고 짐을 내리게 해야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위험한 배에 한참 자라는 꽃 같은 학생이 많이 탔어 그러면 내가 어찌할까 정신을 차리고 배를 잘 운항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가 이렇게 가라앉고 있는데 그러면 내가 어찌할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많은 잘못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면 내가 어찌할꼬 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없어서 온갖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이 너무 커서 우리 스스로 구원을 받을 길이 없고 이대로 살다가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질문 앞에 서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저 자식 저거 참 얄밉다 세상에서 죄란 죄는 다 짓고 형편없이 살던 놈이 천국 가겠다고 십자가 붙들고 있네. 염치 좀 있어라 기본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정말 얍삽한 놈이다.     


  이렇게 비웃을지라도 그럴수록 우리는 더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 나는 나쁜 놈이다. 너희들은 잘나서 잘난 것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지만 나는 못나서, 나는 잘 못 살아서, 나는 허물이 많아서, 나는 죄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만 의지한다. 어쩔래. 내가 십자가 믿고 의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너에게 피해주는 것 있니…….


  잘난 사람 다 잘난 대로 살게 내버려두고

  죄와 허물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만 여기 모이시면 됩니다.

  자기 스스로 선한 일 많이 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데 가셔도 되지만 그런 자신 없는 사람은 꼭 여기 모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우리가 비록 인간답게 살지 못했지만 우리가 비록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이나 당하지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

  그분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서 흘려주신 십자가의 보혈만이 나의 의로움이 됩니다.

  그 피를 믿는 믿음만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질문 앞에 서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유일한 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삶도 바뀌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위대한 계명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삶의 방향이 삶의 가치관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자세가 기도의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사랑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삶의 태도나 목적이 바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나의 주변의 사람들이 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나의 이웃이며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 앞에서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질문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마음의 찔림이 있어야 하고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 앞에 가슴 아파 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그런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성도답게 하나님 사람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