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33)

  본문 : 행 2:40-41    

  제목 : 이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으라.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 목적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것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이냐고 할 때 많은 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사는데 말로만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믿습니다. 라고 고백만하면 다 구원을 받으면 참 좋겠는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믿음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믿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훌륭한 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이순신을 만나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가 훌륭한 장군이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사실을 믿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역사적인 믿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목사의 설교를 들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그것이 사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 그런 믿음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셨을 때 귀신이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눅 8:28)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 자체는 귀신들도 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 가지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실적인 믿음 혹은 임시적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옥토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나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가시덩굴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돌짝밭의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가시 넝쿨은 뿌리는 내렸으나 세상의 풍파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이 끝까지 가지 못하는 믿음도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적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희한하고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기도도 많이 하고 고행도 많이 하고 영력을 키워서 기도하면 병이 낫기도 하고 기도하면 이상이 보이기도 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믿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기적도 일으켰는데 왜 나를 받아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따질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는 이런 요소들 즉 예수님을 아는 것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것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믿음을 나타내는 것 혹은 믿음을 가지는 것에 포함이 되어 있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은 지적으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정적으로 그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의지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사는 삶이 포함되어 있어야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구원”이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광성교회 성도님들이 그냥 믿음의 일부만 가지고 있다가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 40절 말씀에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우리는 앞서 14절에서 36절까지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의 내용은 대충 중심적인 말씀을 정리한 것이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말로 확증하며 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설교를 통하여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을 다 알아듣고 믿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경우를 들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진리를 설명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확증하며 권하여”라는 말은 대강 적당히 말을 하지 않고 아주 강력하게 요청을 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확증이라는 말은 증인으로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확실하게 목숨을 걸고 이 말을 보증하면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설교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설교가 베드로의 설교처럼 이렇게 목숨을 걸고 책임 있게 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대충 준비해서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기나 하고 그러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하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하도 잘 안 듣고 졸기나 하니까 웃겨서 깨워야겠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설교가 웃기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강 적당히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목숨을 걸고 증언하는 증인의 마음으로 외치는 것이 설교입니다.


  “권하여”라는 말은 강하게 요청하고 강하게 부르고 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경고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것도 멀리서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 가서 그 사람이 꼭 알아듣도록 알아듣고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요청을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을 향하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나 듣고 못들은 사람은 그냥가고 그런 심정으로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곁에 가까이 가서 바로 당신 당신에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바로 지금 당신에게 경고하니까 거기 그대로 있지 말고 이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빨리 거기서 나오십시오.


  오늘날의 성도들은 큰 교회에 가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멘 하니까 그 설교가 좋은 설교인 것도 같고 마음에 와 닿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데 가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오늘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듣지 않습니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듣고 그저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주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한 주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작은 교회는 비교적 담임 목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태를 잘 알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기 때문에 그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다가오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곁에 오셔서 강하게 요청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그것이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이 경고의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위로이든 경고이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베드로사도가 설교를 통하여 핵심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이 말일 것입니다.

  그가 증인으로 목숨을 걸고 정말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너희가 지금 있는 곳은 패역한 곳이다 거기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이다.

  빨리 결심하고 거기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자.

  내가 목숨을 걸고 증인으로서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쉽게 듣고 흘리지 말고 꼭 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패역한”이라는 말은 휘어지다, 굽어지다, 비뚤어지다. 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지금 그들이 사는 세상 사람들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굽어지고 휘어지고 비뚤어져서 바른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이런 패역한 세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2-5)라고 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죄악은 똑 같습니다.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비뚤어진 길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만하고 교만하게 삽니다.

  돈을 사랑하고 세상 쾌락을 사랑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모함하고 사납게 삽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조급하고 배반하고 삽니다.

  무정하고 원통한 것을 풀지 않고 삽니다.


  이런 정도를 더 넘어서 인간의 기본 도리도 하지 않고 삽니다.

  마땅히 사랑하며 섬겨야할 부모를 거역하면서 삽니다.

  술과 마약과 오락과 투기와 음행과 말로 할 수 없는 악행이 저질러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 패역한 세상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탈출해야 산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런 패역한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그들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생명과 관련해서 구원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타락함으로 인해서 생명의 단절을 맛보아야 했는데 이런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부활로 다시 살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지옥에 갈 우리의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가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원이란 하나님과 교제와 관련해서 구원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타락함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단절되어서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고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늘 죄를 지으면서 친죄 성향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에서 다시 교제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한 것은 우리가 타락하여서 영적인 소경이 되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을 잘 알지 못해서 죄와 친하게 지내고 지를 지으면서 삶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게 사는 삶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죄를 짓지 말고 죄를 짓는데서 벗어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죄에서 벗어나는 삶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패역한 세대를 박차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죄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성령님의 은사를 주셨다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패역한 세대를 박차고 나오게 하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론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가 포함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패역한 세대에서 박차고 나올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아직 이런 패역한 세상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그들과 어울려 그들처럼 살고 있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영원한 천국으로의 구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은 눈을 뜨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패역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보시면 기기에 참된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보람 있게,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멋있는 삶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본문 41절에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강력하게 권하고 경고를 하니까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신도가 되었는데 그 숫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목사들이 참 좋아하는 말이고 동경하는 말입니다.

  한번 설교를 했는데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설교를 했기에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돌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강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의심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 그날 기적이 일어났구나, 엄청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구나. 라고 생각을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꺼번에 세례를 삼천 명이나 어떻게 받았을까?

  그것도 약식세례가 아니고 침례라고 하면 거기에 강도 없고 어떻게 침례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삼천 명이라는 숫자도 좀 그렇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가 2만 내지 3만 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확실하지 않고 더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만약 삼만 명이라면 총 인구의 10% 이상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것이 관연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모여서 떡을 떼며 교제를 했을까 하는 것이고 또 예루살렘교회의 성도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몇 년 후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다 세례를 받고 신도의 수에 들어갔지만 그들이 다 참된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는 마음에 찔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았고 세례를 받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너도나도 다 하니까 따라서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신앙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하다가 보니까 보통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삶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재산도 가족도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고 따르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중간에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패역한 세상이 너무나 좋아 보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잠시 나왔다가도 또 다시 그들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하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직 하차하지는 않았지만 하차할 핑계를 살피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자칫 마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세상으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패역한 세상이 비뚤어진 세상이 너무나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천 명의 신도들이 얼마 못가서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역사적인 믿음인지, 임시적인 믿음인지, 기적을 추구하는 믿음인지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우리 삶에 실천을 하여 열매를 맺는 것처럼 확실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도 패역한 세대입니다.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사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기억하시고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