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39)

  본문 : 행 2:44-45   

  제목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개혁주의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죄에서 죽음에서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이 믿음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선택을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개혁주의교회라고 단서를 단 것은 이 구원을 얻는 믿음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반대로 영원한 생명 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개혁주의교회에 속한 교회로서 철저하게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믿음이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확신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백성임이 분명합니다.

  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나를 선택해 주시고 그 믿음을 은혜로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 우리가 계속해서 자주 생각할 것은 그 믿음이 무엇을 믿는 믿음인가를 생각해보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한 것을 믿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을 붙잡고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고 다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지 엉뚱한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오는 것이고 사도들이 고백한 그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가르쳐준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매주 고백을 하는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고백한 신앙고백을 아주 잘 정리한 것입니다.

  그 사도신경에 고백하는 대로 믿는 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핵심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병을 고쳐줄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부자가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런 세상적인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믿는 것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또 하나 늘 생각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은 살아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변화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거나 가짜 믿음 즉 죽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거나 믿음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하고 교회에만 왔다가 갔다가 하거나 믿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어떻게 복이나 받아볼까 하고 교회에 오거나 마음에는 없으면서 외형적으로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진짜 믿음을 가졌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그런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그들이 행한 삶이 있든지 적어도 그런 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살아있는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이나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들이 필요한대로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믿는 사람들이 다 한 장소에 함께 모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살아야 한다. 

  산골이나 사람들이 없는 데로 가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이비 이단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박태선의 신앙촌이나 비슷한 이단들이 많이 일어나서 세상을 떠나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라고 하신 말씀은 앞뒤를 잘 살펴보면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이 다 한 장소에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당시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삼천 명이라고 했는데 그 삼천 명의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산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따로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46절의 말씀에 의하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 떡을 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성도들이 각자의 집에서 살다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일 때 “마음을 같이하여”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칼빈은 본문의 “함께 있어”를 “동일한 생각이나 뜻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모일만한 큰 교회당도 없고 함께 생활할만한 터전도 없어서 각기 따로 흩어져서 살고 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 유대인도 있었고 유대인들이 짐승만도 못하게 생각하던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거기 주인도 있었고 그 주인집에서 종노릇하는 노예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난한 사람도 있었고 부자도 있었습니다.

  기기에 권세를 가진 사람도 있었고 힘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다 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다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했습니다.

  서로가 차별이 없는 귀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게 만들었을까요?

  유대인이 그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이방인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주인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부자나 권세 자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귀한 형제로 받아들이게 한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들을 보면 이 세상에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가 다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서면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겸손해지기 때문에 서로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아직도 자신의 지위나 학력이나 재력을 자랑하고 자기 생각을 앞세우고 교만한 사람은 아직 십자가 앞에 서 보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교회에 나와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 같이 엄청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따라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교회에 나아와 성도가 된 사람들은 모두가 다 똑 같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은 사람들이 된 너무나 귀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다고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권력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고발하거나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 마음이 되어서 한 형제자매로 한 몸의 지체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끔 자신의 신세를 처량하게 생각하면서 열등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조금 부족하게 보이고 어려운 삶을 살지라도 우리 모두가 엄청난 신분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머지않아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잠시잠깐 사는 세상에서 우쭐대거나 우울해하면서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엄청난 차별이 있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다 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큰 교회의 목사는 많은 존경도 받고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삽니다.

  작은 교회의 목사는 어디 가도 알아주지도 않고 목사라고 취급도 안 합니다.


  그런 교회에서의 성도들도 많은 차별을 받습니다.

  헌금 많이 하는 부자는 복을 받고 또 받아서 더 부자가 되게 하고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어서 떳떳하게 삽니다.

  헌금도 못하는 가난한 사람은 눈칫밥이나 먹고 평신도나 하면서 잘 하는 사람 박수나 치면서 살아갑니다.

  충성을 잘 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충성을 못하는 사람은 복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서글프게 삽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차별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십자가의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바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고귀한 신분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0장 11-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9)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차별이 없는 다 소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며 차별을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믿는 사람들은 다 한 마음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서 서로 존경하고 살아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아주 중요한 차이는 성경을 보는 신학의 차이와 목사들 간의 목회철학의 차이로 인해서 교회마다 다른 모습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다 개혁주의 정신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살게 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듭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동사니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런 차이로 인해서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약간의 차이가 난다면 서로 양보를 하고 하나가 되겠지만 기독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잘못된 신학사상들이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복을 영원한 천국의 복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 자신이 출세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끼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칼빈은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교회의 적들이 결탁해서 서로 협정을 맺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사이비 이단들과 거짓선생들은 서로 하나가 되고 단단하게 뭉쳐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이럴 때 우리 성도들끼리 바른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끼리 하나가 되어서 적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모든 물건을 네 것 내 것 없이 서로 함께 쓰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재산을 팔아서 재산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공동체인 것 같습니다.

  서로 모여서 이렇게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말씀도 앞 절과 연결하여서 해석을 하여 어떤 한 장소로 모여서 살고 모든 물건을 서로 함께 사용을 하고 사유재산은 다 팔아서 공동체 앞에 내어놓고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도 앞서 살펴본 대로 함께 하는 것이 한 장소를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공동체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서로 나눌 것이 있으면 나누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면서 살라는 뜻이지 공동체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동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 속에서 많은 갈등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서로서로가 잘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면서 살았는데  잘 사는 사람은 너무나 잘 살고 힘들게 노력을 해도 못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못사는 세상이 되니까 서로 함께 잘 산다는 공산주의 체제를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도 이미 그런 체제 자체로는 자본주의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공산주의 국가들도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일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기본 마음이 개인주의적이고 또 욕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다고 해도 그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공평한 세상은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착한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공평하게 산다고 해도 그런 이상적인 세상은 만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이 세상에 타락한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인 세상은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말하는 첫 번째 구절에서 이런 불가능한 일을 그들이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초대교회가 시작 된 이후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일부 수도원 생활을 제외하고 이런 삶을 산 공동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제일 먼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비록 그렇게 완벽하게 잘 실천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종요한 삶의 원칙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로 한 마음이 되어서 사는 것,

  서로 모든 것을 함께 사용하면서 사는 것,

  그리고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이런 것이 성도들에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이기주의적인 세상에서 나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이런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서로 함께 나누고 나의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정신은 너무나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 나그네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 길에 많은 재물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적당하게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함께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으로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것도 없으면 몸으로 우리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에 쓰임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사람은 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악한 원수가 대적을 해 온다고 해도 함께 힘을 합하여 이길 수 있도록 마음과 뜻을 같이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서로 다 내어놓고 함께 주님의 일을 하는데 쓰임 받게 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 소유를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천국 가는 길에 함께 가도록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가진 자들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당연히 행하여야 할 덕목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