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46)
  본문 : 행 3:9-10   
  제목 : 보고 알고 놀라니라.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거지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음을 받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건과 연결되는 말씀을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본문을 읽는 순간 “아! 오늘 설교는 안 들어도 다 알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딴 생각을 하거나 슬슬 주무실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신 분들은 그것은 수십 번 들었던 이야기이고 나는 앉은뱅이도 아니고 멀쩡한 사람인데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뭐하겠느냐는 생각에서 설교에 대한 흥미를 잃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참 신비한 것이라서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실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시대를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또 각 사람에게 그 말씀을 대하는 순간마다 더 큰 의미를 알게 하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각자에게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칼빈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주석하면서 성경에서 기적적인 기사를 기록할 때는 반드시 그 기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적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지는 않고 오히려 그런 기적적인 일들을 잘못 이해를 해서 사람들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로마교회는 이런 기적적인 일들을 교회가 늘 할 수 있는 일처럼 가르치면서 교회를 미신에 빠지게 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한 베드로를 신격화해서 마치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진 성인으로 추앙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회 내에도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고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사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들을 잘 살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주장을 합니다.
  신비한 능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환자들을 낫게 해 주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주장을 합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 기적을 행한 베드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치켜세우고 그 자리에 자기도 함께 서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성경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을 하여서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서두에 누가가 기록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말씀이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중요한 핵심 역할을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1-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고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이론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몸소 행하시면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행하신 것만 아니고 그 행하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역사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여 기록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였고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신다는 것입니다.

  1장 3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아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친히 살아계심을 확실한 많은 증거로 그들에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나라의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라고 했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라고 하시면서 권능을 받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행하고 그 의미를 가르치시고
  친히 증거로 보여주시고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기적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원칙으로 사도행전의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서 본다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맨 처음에는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 앉은뱅이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까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목적은 이 고침을 받은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를 고쳐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지는 큰 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변화된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게 하고 그도 구원받은 백성으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많은 면에 있어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고 구걸이나 해서 먹고 살던 불쌍한 사람의 처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불러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우리에게 차원 높은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달라진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서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서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도 역시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부족하고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육신의 삶도 달라져야 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고통 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그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하겠지만 좀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난이 세습되는 세상입니다.
  부자로 태어난 사람은 부자로 잘 살지만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또 가난하게 살게 됩니다.
  옛날에는 가끔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가난한 가운데서 스스로 노력을 해서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극히 드물기는 하지나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태어난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바른 삶을 산 사람 가운데서는 자기의 환경을 뛰어넘는 특별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바르게 살 때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으로서 과거와는 정말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만 하던 사람이 감사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주의자가 이웃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죄를 무서워하고 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고 그 역사함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삶에 좋은 열매들이 맺히게 됩니다.
  사랑의 열매 희락의 열매 화평의 열매가 맺힙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가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변화된 삶을 보고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때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변화된 우리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에 젖어서 사는 우울한 인생들에게 우리의 노래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보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신앙이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고 내가 마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보고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양심적으로 사는데 나를 나쁘게 보거나 좋게 보거나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으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외형적인 행동이 나를 구원받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내가 마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 제 1호는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증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삶은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믿고 있는 바를 삶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만 우리의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이 나를 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동료들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해 주신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 저 분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어.
  아! 저분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
  아! 저분이 찬양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고 얼마나 찬양받으실만한 분인지를 알 수 있어.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본문 10절에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기뻐 뛰면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본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보통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면 점잖게 행동을 하고 점잖게 찬송을 하는데 이 사람은 되게 촐랑거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히 뛰고 걷고 열심히 찬송을 합니다.
  우리도 그 사람의 입장이 되면 그렇게 열심을 낼 것입니다.
  길길이 뛰면서 목청이 터질 듯이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왜 저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걷고 뛰고 찬송하는가 하고 살펴보니까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일어서본적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저렇게 건강한 몸이 되고나니까 저렇게 기뻐했구나 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신분을 가질만한 자질이 없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손을 잡아주시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다면 당장 다시 옛날 죄인의 자리로 저주받을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억만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별 볼일이 없는 나를 흉악한 죄인인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원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이 해애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믿음이 있던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도 진리가 무엇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가 다시 불구자가 되고 다시 거지꼴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가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 쉽게 교회를 떠나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인이 해야 할 최소한의 희생이나 헌신도 하지 않고 부담 없이 교회만 다니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큰 교회에 가서 그냥 예배나 잠깐 드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고 진정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람만 좀 더 세게 불면 세상으로 불려나갈 위태한 사람이요 그런 위험을 안고 일시적인 육신의 평안을 위해서 그런 자리로 가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일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또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대강 적당하게 세상 사람들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분명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인 줄을 알고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고 했습니다.
  잠시 전에만 해도 문 앞에서 서지도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구걸이나 하던 사람이 서서 걷고 뛰고 찬송하는 것을 보고 모든 백성들이 아주 많이 놀라워했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삶에도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는 이미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아서 영원히 멸망하고 말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되찾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일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들로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야!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잘 됐어 대단하다. 잘 됐다. 하는 탄성들이 우리 성도들이 삶에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놀라운 일은 우리가 더 주님께 가까이 가고 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입니다.
  세상적인 놀라움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알량한 신앙마저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진리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적당히 교회에 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새해에 우리교회의 표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정했습니다.

  이 말씀이 앉은뱅이 같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앉은뱅이 같은 우리의 신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놀랍고 놀라운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그를 보았습니다.
  구가 누구였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도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보고 알게 된다면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