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47)
  본문 : 행 3:11-12   
  제목 :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2015년의 첫 주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성도님들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늘 동행하셔서 더 지혜롭고 더 능력 있고 더 보람된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올해의 표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정했습니다.
  날 때부터 걸을 수가 없었던 사람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이나 해서 먹고 살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나게 되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사실 이런 놀라운 일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건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교회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는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 사람들만 와 있는 자리입니다.
  오고 싶다고 아무나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우리가 이런 복된 자리에 올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2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여기 우리만 이렇게 모여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연들이 있고 많은 사정들이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다시 일어나 걸으라고 한다고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멀쩡하게 잘 걷고 있고 영적으로도 이렇게 신앙생활 잘 하는 나에게 또 어떻게 걸으라고 하느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마음은 참 이상한 것이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옛날로 돌아 가버립니다.
  이제 됐다고 조금만 방심을 하면 어느새 죄악 된 세상으로 조금씩 빠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로 변했는가도 잊어버리고 내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마저도 잊어버리고 타성에 젖어서 살게 됩니다.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채찍질을 가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 -14)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하여 만족해하지 않고 더 달려가려고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부분적으로 아직 일어서지도 못하고 불구자처럼 겨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어서기가 무서워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자신이 없어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아직도 손을 내밀지 못하고 아직도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랜 신앙생활로 타성에 젖어서 앉아 있거나 아직도 손을 내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거나 아니면 부분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매일 일어나 걸으라고 자신에게 외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고침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은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뻐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문득 자신을 고쳐준 두 사람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서 붙잡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그들이 있는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서 그 기적을 베푼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바라봅니다.
  그 때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향해서 이 사람이 나음을 받은 것은 자신들이 권능이나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음을 받았음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본문 11절 말씀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었다고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크라테오(κρατέω)로 ‘강한 힘’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어깨에 매달렸다고 주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냥 베드로와 요한 곁에 붙어서 따라다닌 정도가 아니라 와서 그들을 붙잡고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귀찮게 붙잡고 매달렸을까요?
  너무 고마워서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뭐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 거지 인생에 뭐가 가진 것이 있었겠습니까?
  마음으로라도 그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 그들을 껴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분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고 늘 동행하겠다는 마음으로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정말 마음에 두고 붙잡은 이유는 이 사람들이 나를 고쳐주었다는 것을 사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가 사도들을 붙잡은 장소는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행각이란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 형태의 건축물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무너졌지만 성전을 재건할 때 그 행각은 그 형체를 남겨두고 보수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행각을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는 평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고 제자들도 거기서 전도활동을 자주 하는 곳입니다.
 
  그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까 사람들이 놀라서 그들 앞으로 모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모였던 사람들이 평소에는 베드로와 요한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이고 그 제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 사람들이 이런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보러 모인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붙잡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그를 낫게 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일차적으로 실행한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사도들 앞으로 모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자여로 살게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위해서 성령님을 붙잡고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셔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으시고 능력을 받으시고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성령님께로 그래서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분의 목회자를 붙잡으십시오.
  바른 진리를 아는 목사의 손을 붙잡을 때 여러분을 성령님께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교회 담임목사를 여러분의 영혼을 맡은 위임목사로 인정을 한다면 꼭 붙잡을수록 좋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 의심이 있고 간격이 있으면 제가 주일마다 드리는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목회 경험을 통해 여러 교회 여러 성도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가 목사와 가까이서 목사로 인정하고 좋게 여기면 그 사람의 신앙이 향상이 되고 반대로 신뢰하지 못한 상태가 되고 껄끄러운 사이가 되면 신앙이 퇴보합니다.

  제가 스스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여러 면에서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족한 점들을 보지 마시고 저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관한 열정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계속 배우고 계속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그 복음을 위해서 살게 하는 일이 목사가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이고 가장 소중한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손을 잡으시면 제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제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제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충성 제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말하되

  본문 12절 상반 절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나올 때부터 불구자인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게 된 목적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가 제일 큰 목적이겠지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을  놀래게 해서 그 사람들을 사도들 앞으로 모이게 하고  사도들로 하여금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게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은 사람은 사도들을 붙잡고 이들이 그 사도임을 알게 하고 그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말해봤자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별 효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는 인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할 때 순수하게 오라면 오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있어야지 옵니다.
  어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라도 있어야 저들이 교회로 오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가 한 사람당 한 사람씩 전도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말은 참 쉽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남의 말에 눈 닫고 귀 닫고 사는 사람들이라 우리가 뭐라고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강단 앞으로 모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들이 놀랄 만한 일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야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때 여러분도 더 행복해 지고 여러분 안에 있는 믿음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보고 더욱 믿음이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삶에 일어난 놀라운 일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고 우리가 가진 복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도 그 도우심을 믿고 그 도우심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진리라고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나 같습니다.
  안다고 그냥 있지 마시고 아는 것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노력과 애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 1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조상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을 베풀었는지를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 때 베풀었던 기적 광야 생활 때 베풀었던 기적 가나안 정복 때 베풀었던 기적 그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기적적인 사건들을 다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겨우 앉은뱅이 한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그리 놀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교적 이런 작은 기적을 보고 놀란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정말로 믿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은 했지만 형식에 불과 했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역사에 관여하시고 율법도 주시고 선지자들도 보내주시고 성경 말씀도 주셨는데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입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으로 믿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어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적이 베드로의 권능이나 그의 경건한 삶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이 알지 못한 초능력이 있든지 아니면 그가 기도생활을 많이 해서 혹은 말씀을 잘 순종해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행하신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주목하지 말고 이 일을 행하신 진짜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낳은 사람들이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 위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는가가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살피고 하나님께서 워하시는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는 그 사람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지만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참된 삶을 살 수 있고 우리의 삶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 해는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를 붙잡고 성령님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쓰임 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