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1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52)
  본문 : 행 3:19-21   
  제목 :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요즘 사람들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형편도 어렵고 뭘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서 오히려 열등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런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키워주고 칭찬해서 자신감을 갖게 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이제 다 자신감으로 차 있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교만해져서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모임에 가서 오랜만에 전에 알던 목사님을 만났는데 저는 그 분에게 여전하시네요, 옛날 모습 그대로십니다. 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에게 양 목사님 많이 늙으셨네요. 라고 인사를 합니다.
  만난 지 10년이 넘게 세월이 흘렀는데 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인사를 받으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칭찬하는 말에 익숙해져서 바른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부심이 더 대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대단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 이런 자존감이 우리의 신앙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데서 시작을 하고 날마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칭찬의 문화와 각 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도 없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난 사람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착각하고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존심으로 인한 교만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좋은 신앙인이 되지 못하고 그저 명목뿐인 신앙인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회개하라”라고 시작을 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회개가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라.

  본문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1)베드로 사도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예 작심을 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당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칭찬을 해주시기는커녕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욕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게 해버린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잘못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형식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겉보기는 그럴듯해 보여도 속은 새까만 죄가 들어 있는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회개를 해도 한참 많이 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그들에게 지금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죄들을 회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해야 할 치명적인 죄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입니다.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였기 때문에 구원의 필요성도 모르고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몰라본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죄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회개해야 할 큰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2)회개하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회개해야 할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회개해야 할 여러 가지 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들을 생각하면 늘 울면서 회개를 해도 다 못할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사람들에게 받은 칭찬 때문에 지나친 자존감과 자부심 때문에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회개해야 할 잘못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국무총리를 바꾸어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바꾸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많이 있는데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착하고 바른 사람이라고 해서 지명을 했는데 하나하나 그가 살아온 과거를 파헤쳐보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집이나 땅을 사기 위해서 불법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는 것은 거의다가 기본이고 세금을 안냈거나 편법으로 돈을 벌거나 일부러 편법으로 군대에 안 가거나 이런 저런 비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 같고 착하게 살아온 것 같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까 형편없는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벌을 받아야 할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떨까요? 
  다행히 국무총리로 지명이 안 되어서 그렇지 만약에 우리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우리의 과거 행적을 조사해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누구의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스스로를 보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나를 좋아하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래도 좋은 사람입니다.
  내 자식들은 아무리 봐도 좋습니다.
  나의 장점만 보려는 사람의 눈에는 그래도 한두 가지는 상을 받을만한 좋은 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나 나의 죄를 밝히려고 하는 사람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면 엉망일 것입니다.
  나의 죄를 밝혀서 벌을 받게 하려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참 한심한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회개하라고 하는 죄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제일 큰 죄는 율법을 어기거나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죄입니다.

  조금 크고 조금 작은 것의 차이일 뿐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충분한 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도 회개를 하고 돌이켜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도 예수님을 몰라보는 죄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몰라 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잘 모르거나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가치 없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잘 믿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는다고 한다면 그 믿음과 삶이 일치해야 하는데 말은 믿는다고 하고 교회는 다니는데 살아가는 모습은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잘 못 알았든지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든지 결론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이 길 보다 세상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이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존심만 강하고 교만하여 자기 생각 자기 기분만 앞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믿음 없이 사는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 죽은 믿음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비웃는 그런 불순함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3)회개는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침부터 여러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죄인이고 나쁜 사람들이고 지옥에 갈 사람이라고 말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모든 죄에서 깨끗해질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돌이키는 것 그것이 죄 없이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이런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도덕적이고 바르게 살려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을 살펴보고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고 고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한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성도들의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들에게 형벌을 받게 하고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죄를 지적하는 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한 죄를 지적하는 것은 바른 믿음을 가짐으로서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어떤 흉악한 죄를 지었다고 하드라도 흰 눈처럼 양털처럼 깨끗하게 씻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본문 19절 하반 절에서 20절에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했습니다.

1)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개정한글에서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번역을 했었습니다. 새롭게 되는 것이나 유쾌하게 되는 것이나 비슷한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니까 좀 새로운 날이 와서 근심 걱정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쾌한 일들이 더 많으니까 유쾌한 날들이 새롭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삶들이 꼭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좁은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고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정말로 재미있게 삽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즐기고 싶은 것 마음껏 즐기고,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가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세상 재미는 없어지고 이것저것 잔소리는 더 많이 들어야 되고 해서는 안 될 것 먹어서는 안 될 것도 너무 많고 가서는 안 될 곳도 많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믿으면 새롭고 유쾌한 날보다 옛날 구식으로 살아야 하고 불쾌한 일이 더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일들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2)새롭게 되는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죄악 속에서 방황할 때보다 지금 이렇게 진리를 알고 바른 삶을 살게 된 우리 앞에 오는 모든 날들은 모두 유쾌하고 새로운 날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람이요 우리의 모든 날들이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날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새롭게 되는 날이 지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새롭게 되는 날 혹은 유쾌하게 되는 날은 20절의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서 예정하신 예수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날 그 날에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고 유쾌한 날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그 재림의 날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죄 사함은 최후의 심판의 날을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에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아도 된다면 구태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생들에게 우리의 모든 삶을 결산하는 최후의 심판이 없다고 한다면 이렇게 어렵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돌이킬 필요도 없고 아무렇게나 즐기면서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이 아까운 세월을 아끼면서 하루라도 더 즐기면서 살려고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합니까?
  내 인생에 최고 이고 내 삶이 최고인데 왜 내가 남을 위해서 삽니까?
  왜 내가 남의 간섭을 받습니까?
  왜 내가 남에게 기분을 상함을 받아야 합니까?
  왜 내가 죄인이라고 하고 왜 내가 회개를 합니까?
  너나 나나 똑 같은 사람들인데 왜 나만 죄인이라고 인정을 하고 회개를 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날에 가서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앞에서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죄인으로 확정판결을 받고 그 받을 형벌이 무엇인지를 알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십니다.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수고한 수고를 알아주시고 상을 주십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수고를 칭찬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수고와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늘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새롭게 되는 날을 바라보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날에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기뻐하며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