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57)
  본문 : 행 4:1-4   
  제목 : 부활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 안에 아주 대립되는 사상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핵심적인 것은 교회를 지키느냐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 교회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당 건물을 비롯해서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의 사업이나 교회의 권력 같은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라는 말은 그런 외형적인 것보다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을 말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고 왜 믿어야 하는가를 알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이런 외형적인 교회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교회당 건물을 화려하게 짓고 장식을 화려하게 하고 미사를 엄숙하게 드리고 교회의 교황이나 사제들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키워나가는 일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교황이 하는 말을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었고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도입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잘못된 것들을 개혁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붙잡고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들어와서 한참 부흥을 해 나갈 때 일제의 침략으로 교회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기나라 왕이 신이라고 해서 천황이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그 일본의 신사를 향하여 참배를 강요하고 하나님보다 일본천황을 더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교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사참배에 반대를 하면 교회가 문을 닫아야 했고 교회에서 해 오던 학교 운영이나 선한 사업들을 할 수 없는 것이 뻔하기 때문에 교회를 지키고 교회가 하는 사업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교회당에 일본의 신사를 걸어놓고 예배드리기 전에 신사참배를 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반대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교회를 빼앗기고 교회가 하는 사업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교회를 빼앗기고 감옥에 가서 고생을 하고 순교를 하면서 까지도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고신교단은 그런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세운 교단입니다.
  외형적인 교회당 건물이나 교회의 사업보다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당 건물과 교회의 조직과 외형적인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회를 통하여 육신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이 세상의 복 보다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바른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세력이 각각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도 그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성전을 지키며 성전을 통해서 권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싸움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도들

  본문 1절 말씀에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그것을 알고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설교를 하고 있는 중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몰려와서 설교를 방해하고 설교하고 있는 제자들을 붙잡아갔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의식을 주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내에는 항상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고 교대를 해가며 제사를 드리는 일에 수종 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레위인이었고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제사 드리는 헌물과 십일조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맡은 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문은 성전을 지키는 경비대장으로 번역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에는 성전 경비대장이라고 번역을 했고 영어성경에서도 성전 경비대장(the captain of the temple guard)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출입이나 성전의 행사가 있을 때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대장은 성전에서 대제사장 다음가는 권력을 가진 서열 제 2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두개인은 바리새인과 유대교의 한 종파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었지만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는 정치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혼 불멸이나 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고 메시야를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권력에만 눈이 멀었고 권력을 위해서 로마인들과도 결탁을 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세 권력들이 자기들의 권력을 빼앗길까봐서 한참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기독교의 복음전파를 싫어해서 복음전파의 현장을 급습해서 방해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붙잡아 가버린 것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전에서의 제사에만 열중하고 그 성전 제사를 통해 자기들이 먹고 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을 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이 가진 직업 재산 가정들을 다 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자기 이익을 찾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사도들은 다 같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편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육신의 복을 받고 자기가 목적한 바를 이루고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겉으로는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권리에는 조금도 연연하지 않고 오직 교회가 잘 되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헌신을 합니다.

  목회자들의 세계를 보면 이런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말은 복음을 위한 목회자라고 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고 사람들의 가려운 곳이나 긁어주면서 자기편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은퇴할 때가 되면 돈을 받고 교회를 넘기는 사람도 있고 은퇴 후에는 많은 재산을 모아서 잘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했는데 은퇴 후에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왜 목회를 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목회자들은 어려움을 당해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가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위해서 삽니다.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보험하나 들지 못하고 노후의 대책 같은 것 생각도 못하고 오직 주님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조건 큰 교회를 목회자는 성공한 목회자라고 하고 존경하고 따르면서 작은 교회 목회자는 업신여기고 무시하려고 합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느냐 외형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느냐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전파하는 사람들과 부활의 전파를 방해하는 사람들
     
  본문 2-3절 말씀에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들에게도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3장에서 살펴 본대로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부활을 확실하게 증거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3:14-1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파하고자 하는 복음의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서만 최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것이 영생과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좋은 것들을 다 주셨습니다.
  천지만물도 다 주셨고 우리 인간 자체도 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이고 어느 것 하나 나 스스로 만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 모든 좋은 것들 중에서 우리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모든 만물들이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때가 되면 없어져버리는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해서 그 좋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특별한 사람들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그 일을 시행하셔서 드디어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줄 메시야로 이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레에게 부활과 영생을 다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원문을 보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히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부활을 전하는 것을 막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이익만 바라보다가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영생과 부활을 놓친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것 때문에 엄청나게 큰 것을 놓쳐버린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더라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제사의 의미를 알고 제사를 드리는 일을 도왔다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폈더라면
  그렇게 엄청난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그놈의 권력이 무엇인지 
  그놈의 욕심이 무엇인지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바보 멍청이가 되어 벼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최고의 선물인 영생과 부활을 두고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영생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것을 뒤로하고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이 세상에서 사는 것에 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온갖 이상한 신학과 온갖 이상한 성경해석을 가지고 자기들 주장을 옳다고 합리화 시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든지 어떤 유명한 신학자가 내세운 학설을 가지고 이야기 하든지 심지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직접 음성을 들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활과 영생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성경해석이고 잘못된 신학일 뿐입니다.

  부활과 영생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사탄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소식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막기 위해서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부활이 없다거나 영생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은근히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크게 이야기함으로서 부활과 영생을 값없는 것으로 아예 없는 것으로 알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중요한 것을 놔두고 다른 것을 가르치고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부활과 영생의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정없이 사탄의 졸개로 취급하면 됩니다.
  사탄이 그들의 마음에 역사해서 그들에게 엉뚱한 것을 가르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영원한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것을 놓지 못하고 이 세상의 일을 영원한 천국의 일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본문 4절 말씀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믿는 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수가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자나 아이들까지 하면 만 명도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숫자와 합하여 오천 명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삼만 명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구 삼만 명 정도의 도시에 만 명 혹은 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부활을 믿었다고 하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인구의 1/3내지는 절반 가까이가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쉽게 믿게 된 것은 당시의 상황과 많은 연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생생하게 증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서계만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일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조금 더 공부하면 알겠지만 이들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인들과 로마당국의 눈을 피해서 세계만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거기 모여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 사람들로 인해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고 자랑할 것 없습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많아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수백만 수천만이 모인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활과 영생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좋은 것인데 그런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그냥 자기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부활의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모든 삶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부활의 신앙도 없이 그냥 세상의 일을 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복음을 전할 안타까운 마음이 없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믿고 이 부활과 영생을 인생이 가져야 할 최고의 복으로 알고 이 귀한 것은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이웃에게 또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영생을 향하여 가는 사람과 이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이 세상의 복을 받기를 워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편인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명목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