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2.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72)
본문 : 행 5:7-11   
제목 : 어찌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옛날 시골에는 슈퍼마켓도 없고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는데 가끔 엿 장사가 가위를 치면서 엿을 팔러 왔습니다. 엿 장사가 오면 울던 아이들은 울음을 그칩니다. 어머니가 헌 고무신이나 헌 병을 가져다가 엿을 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놀던 아이들이 엿을 사 달라고 울어버립니다.
  그래서 엿 장사가 오면 우는 아이는 달래고 노는 아이는 울린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 잘 못한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회개하고 고쳐서 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잘 하던 사람은 더욱 기쁨으로 신앙생활 잘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못한 사람은 설교를 듣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고 늘 그렇게 살고 잘 하던 사람이 오해를 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저 사람은 저 말씀은 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한 말을 자신에게 한 말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설교는 여러분을 상처받게 하고 나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처럼 여러분의 편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잘 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에게 다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에게 유익한 말씀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들으시고 고칠 것이 있으시면 고치시면 되고 고칠 것이 없으시면 아 나는 잘 살고 있구나 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면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그런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씀입니다.
  목사가 재물이 욕심이 나서 땅을 팔아서 바치라고 하는가 보다, 바칠 때 조금도 숨기지 말고 다 바치라고 한다. 안 그러면 즉사한다고 공갈까지 친다고 오해를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살펴보면 밭을 팔아서 바치라 말아라. 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밭을 팔았으면 얼마라도 감추지 말고 다 바치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령님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은 사탄의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고 사탄이 역사한다는 것은 그가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너무나 위대한 것이고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눈속임으로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일에는 혹시 거짓말로 가식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믿음만큼은 진심으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행동이 따르고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내치심으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특별한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그런 거짓 선생이 들어와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벌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거짓 신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그런 사람들을 따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가 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신앙을 살펴보고 정말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수시로 나를 비추어 보고 설교 말씀을 조심 있게 잘 들으시고 내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 확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삽비라
  본문 7-8절 말씀에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밭을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 앞에 가져갔을 때 얼마를 가져왔느냐? 이게 전부냐?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고 지적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 시간이 지난 후에 남편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고 온 사람들이 도착할 즈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아내 삽비라가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삽비라에게는 회개를 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남편과 같이 공모를 하여 거짓말을 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삽비라가 “예 이것뿐이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 삽비라가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물어올 때 눈치를 채고 진실을 말했으면 아마도 용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것이 문제지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밭은 팔지 않아도 되고 팔아도 다 바치라는 법도 없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진실만 말을 하면 아무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 거짓말을 많이 해봐서 습관이 되어서 거짓말을 했는지 거짓말을 하기로 남편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거짓말의 심각성을 알지 못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거짓말이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말이고 그것이 죽임을 당할 만큼 나쁜 죄라는 것을 알았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거짓말을 찾아보시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얼마나 싫어하시며 거짓말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잠언 19:9절에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시편 5:6절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1서 2:22절에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벌을 면하지 못하고 망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이렇게 악한 것으로 보시고 성경에 기록하고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사탄에게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은 거짓말을 하라고 유혹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너무나 쉽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본문 9-10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함께 꾀하여 거짓말을 한 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어째서 당신들은 서로 짜고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시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 주의 영은 성령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어쩌다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거짓말을 하기로 모의를 하고 속이기로 작정을 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님을 속이고 성령님이 모르실 것이라고 시험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정말로 성령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냥 돈은 욕심이 나고 명예도 욕심이 나서 이런 정도는 별일이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런 행동은 성령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오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되었고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된 것이 교회입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핵심이고 믿음의 핵심이고 우리가 구원을 받게 하는 일에 핵심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성령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인인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충성을 하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혹시 성령님이 계신 것인지 아닌지를 믿지 못하고 시험을 해 보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우리 성도들이 마치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로 내 안에 성령님께서 와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거짓된 행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믿는 척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 된 신앙고백이 참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불교와 다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가 하나님이라고 진실 되게 믿지 않아도 그냥 절에 가서 돈 주고 이름이나 올리면 됩니다.
  돈 주고 등불을 사든지 촛불을 사든지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헌금 좀 한다고 교회에 좀 다닌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셔야 하고 진실 된 마음이 있어야 되고 믿음을 제일로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유교와 다릅니다. 유교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사람 간의 도리를 다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일 좀 하는 것 정도로 신앙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도리를 다한다고 그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진실 된 믿음이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고 성령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참된 믿음을 알고 고백을 하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목사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교회의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 속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열심을 내지 않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일이 바쁘다 피곤하다 형편이 힘들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거나 충만하게 역사하시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와 핑계들이 혹시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아서 그런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계시면 믿음이 있으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핑계나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여러분이 열심을 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충성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에게 잘 해주고 못해주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정말로 믿음이 있는가, 정말로 성령님께서 와 계시는가 그것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지 않아도 찬송을 부르지 않아도 헌금을 하지 않아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면서도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유창하게 했는지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겉으로만 가식적으로만 한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님을 속이고 성령님을 시험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을 해 보셔야 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세상이 두 쪽이 나든지 천지개벽이 있든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온 교회가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절 말씀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 일입니다. 온 교회가 또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아무나 오면 된다고 하고 누구든지 오면 잘해주고 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함부로 해도 되는 하찮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시시한 곳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만 오는 곳입니다.
 
  교회라는 말이 여기에 처음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회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인 단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란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따로 불러 모은 단체입니다.
  교회란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즉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있다가 이렇게 교회에 따로 모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영원히 멸망을 당할 사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복락을 누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던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이런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벌벌 떨리는 가슴으로 최선을 다하여 무엇보다 우선하여 진심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구원만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구원이 무엇인 줄 알고 그 구원을 내가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를 알면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를 안다면 그 은혜가 나에게 얼마나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대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재산을 다 내어놓으라고 해도 내 모든 명예와 내 모든 즐거움을 다 버리라고 해도 가족이나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원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기꺼이 다 내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았습니다.
  가식이나 겉 치례로 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날마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게 해주셨기 때문에 그 믿음의 고백은 진실해야 합니다.
  위대한 믿음 진실 된 고백이 여러분의 삶이 목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