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5.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16)
본문 : 마 5:25-26
제목 :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저에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와 같은 연장선에서 하신 말씀처럼 보입니다.
원망을 들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법정에 고발을 당할만한 일이 있을 때에도 급히 사화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채무를 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빌렸든지 잘못을 저질렀든지 갚아야 할 빚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고의로 그랬는지 어쩔 수 없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채권자는 그 채무자를 법에 고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 고발을 하려고 법원에 가는 도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형편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돈 가져다가 갚아버리면 되겠지요?
갚을 돈이 있으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그런데 갚을 돈이 없으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급히 사화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사화하라’로 번역된 유노에오(εὐνόεω)라는 말은 친절한 마음을 품다. 호의를 품다. 친해지다. 화해하다. 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고발을 하는 사람과 좋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친해져서 화해를 할 수 있는지는 말씀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급하게 해야 한다는 것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발하러 가는 길이니까 지금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화해를 하지 않으면 바로 가서 고발을 하게 될 것이고 고발을 하게 되면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고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아야만 감옥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얼른 가서 고발하지 못하도록 화해를 해서 막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구약성경의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계명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욕을 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멸시 하는 것, 이런 것이 다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살인죄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 그냥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생각이 나면 얼른 가서 화목하고 다시 외사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를 고발하려는 자가 있으면 얼른 사화해야 감옥에 가지도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에게 성질을 내도 안 되고, 욕을 해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되고, 빚을 져서도 안 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못살면 심판을 받고 감옥에 가고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대강 이런 내용인데 여기서 설교 끝 하면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안 나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욕 한번 안 하고, 성질 한번 안 내고, 무시도 안 하고, 빈진 것 신세진 것 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면 그냥 세상에 가서 즐겁게나 살지요
어차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 한다면 세상에서나 즐기면서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율법을 잘 못 이해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지 못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율법에 관한 재해석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율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는 것이 삶의 원칙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아시기만 하실 뿐만 아니라 아시고 조치를 취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의롭게 바르게 삶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이미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이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1.고발하는 자가 누구인가?
본문 25절 말씀에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라고 했는데 여기 너를 즉 우리를 고발하는 자가 누구를 말씀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빚을 받을 것이 있는 사람이 고발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빚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빚을 받을 사람은 우리를 고발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빚 진자가 되지 말고 빚을 다 갚고 깨끗하게 살라고 교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 고발하는 자를 단순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빚을 져서 그것을 고발하는 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고발하기를 좋아하는 사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사화하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사탄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을 해야 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해도 사탄과는 화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발자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디코스(ἀντίδικοϛ)는 공의 정의에 대항하고 반대하는 자로 반대자, 대항자, 대적, 원수, 송사하는 자 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만 살펴서는 이 고발 자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는(눅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 고발하는 자를 하나님으로 급히 가서 화해를 해야 할 피 고발인을 이스라엘로 말하면서 늦기 전에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 고발하는 자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개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를 고발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죄에 빠져 사는 자들에게는 고발 자가 되십니다.
회개하지 않은 모든 죄인들을 재판하여 형벌을 가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범한 자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십니다.
율법에 비추어보아서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그들의 양심의 법에 비추어 보아서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을 반드시 벌을 받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와계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시고 계셨습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살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고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여 형벌을 내리시는 그 당사자인 하나님께서 그것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들 곁에 계실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하지 못하고 더 원수가 되는 길을 택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좋은 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서 그 복음을 자유자재로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5천년의 우리나라의 역사 가운데 100여 년 동안 이런 좋은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황금의 길을 걷고 있는 때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좋은 길이 우리에게 열린 것이 아닙니다.
많은 핍박 속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이 일을 위해서 피를 흘린 후에 드디어 우리에게 이런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께 엄청난 죄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 채권자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이 좋은 길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런 좋은 길에 서 있으면서 이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런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과 화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빚진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남에게 돈을 빌려온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빚진 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빚 일만 달란트라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벌어도 내 목숨까지 다 바쳐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더군다나 그 엄청난 빚을 받을 권리가 있는 채권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고발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고발해서 재판을 받게 하고 벌을 내려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하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저렇게 태평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참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2.길에 있을 때 사화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에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급히 사화하라”라고 했습니다.

‘사화하라’는 말은 서로 원한을 풀어 잘 지내게 하거나 송사를 화해해서 취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빚을 져서 우리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과 하해를 해서 고소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어서 못하고 방법이 있어도 방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방법이 있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급하게 우선적으로 먼저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길에 있다는 것은 고발하는 사람이 지금 고발을 하러 가는 중이고 그 사실을 알고 그 때 그 시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고발을 해 버렸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고발을 하러 가는 사람이 만날 수 없는 먼 곳에 있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텐데 마침 그 고발을 하러가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고 아직 고발을 하지 않은 상태이니까 정말 기가 막힌 찬스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고 하면 가서 이야기를 하나마나일 것입니다. 
빚진 것 다 갚으면 몰라도 와서 죄송하다고 말한다고 사과한다고 어떻게 하든지 꼭 갚겠다고 약속을 한다고 봐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래도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말이라도 예쁘게 하고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성의를 보이면 그래도 좀 달라질 것입니다.

일부러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가 보니까 판단 미스로 또 여러 가지 정황이 불리해지기도 하고 사업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누가 걱정을 하겠습니까?

골치가 아프고 방법이 없으니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도 가서 이야기라도 하고 사과라도 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라도 사화하는 것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우리 하나님은 참 선하신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죄해서 지옥에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회개하게 해서 용서를 하시고 싶어 하시는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길을 만들어 주시고 그 길에서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빚을 졌기 때문에 그냥 잡아다가 죽치고 벌주고 지옥에 처박아 버린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오히려 그 채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빚이나 진 사람처럼 거기서 그 좋은 길에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많이 용서하시는가를 알게 하려고 이렇게 교훈을 하십니다.

어떤 신하가 결산을 해 보았더니 왕에게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더라는 것입니다. 
조사해 보니 빚을 갚을 재산이 하나도 없어서 그 몸과 아내나 자식들을 팔아서 그것이나 바쳐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다 탕감해주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탕감해 주려고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밤새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이국에서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을 반가이 맞아서 다 용서하시고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발하는 자가 길에 함께 있다는 것은 이렇게 기회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길을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지금 그 길에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다행하게도 우리는 그 길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과 하해를 하고 화평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고소는 치하되고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3.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다 갚는 길은 무엇인가?
본문 26절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사화하는 일이 없이 고발을 당하여 옥에 갇히게 되면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아야 거기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밖에서 활동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도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이 옥에 갇혀서 누구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빚을 청산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가서 다시 회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이 세상에서 이 심각한 빚의 문제에 해결을 하고 가야 됩니다.

성경이 여러 가지 사건들과 여러 가지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결론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 푼도 남김이 없이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빚진 자들을 다 심판하시여 지옥의 형벌에 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심판대 앞에 가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그 화해의 길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가지면 우리의 죄의 빚이 다 탕감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받지 않고 이 귀한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