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에 들어가려면
히브리서 3장 7~11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3장에는 모세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모세의 위대함과 그가 감당한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세의 강조함이 단지 모세를 나타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는 그러한 모세보다 더 뛰어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당대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붙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안식(安息;κατάπαυσις, שָׁבַת)”입니다. 이 안식의 문자적인 의미는 ‘쉬다. 그만두다, 중지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이 안식은 단지 휴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창세기 2장 2절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고 쉬셨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안식까지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영원한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신정 왕국을 건설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누리는 삶이 안식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안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이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닙니다. 이는 단지 그림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궁극적이고 실제적인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성취되는 영원한 세계에서의 안식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궁극적인 사명은 바로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저들에게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대속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 참된 안식을 주십니다. 이 안식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이러한 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백성들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모세는 단지 그림자인 안식을 주는 일에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 완전한 안식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옛날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불순종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버리고 복음의 길을 떠나가려고 하는 자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즉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지 못하고 복음을 떠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민수기 13~14장에 있었던 사건, 즉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거기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시편 95편 7~1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과거의 사건이 과거로 끝나지 않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 시대의 사건이 다윗의 시대에 적용된다면, 이 서신을 기록하는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궁극적으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경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안식에 들어가려면』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7~8절에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자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기에 앞서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자는 여기에 인용된 시편 95편의 말씀을 다윗의 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히4:7). 그럼에도 이 글이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즉 성령께서는 구약시대에도 당신의 사람들을 감동하시고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오늘도 당신이 감동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기록하게 하신 이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가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의 말씀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으로 대해야 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시험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외치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마음은 완고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말한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민14:21~24).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직접적인 음성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성령의 영감을 따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또는 목사를 통해서 설교를 들을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해서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특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 성경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기록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내 기준으로 나누고, 구별한다면 이는 그 말씀을 시험하는 것이요, 그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그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Ⅱ.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
본문 9절에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했던 일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일은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과거의 이 일을 통해서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가나안 땅에 쉽게 들어갈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사실 광야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모래와 돌,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먼지뿐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자랄 수 없는 곳입니다. 결국 이 광야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목축업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낮에는 강한 햇볕으로 인해 뜨겁습니다. 밤에는 낮은 습도로 인해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갑니다. 따라서 낮과 밤의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광야”와 연관되는 단어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하루나 이틀을 살기에도 힘든 곳을 40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그것도 남자 장정만 60만 명, 그래서 여자와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합하면 200만을 넘을 것이라고 헤아리는 대규모의 집단이 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논리나 상황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이 광야는 인간의 불가능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심을 경험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어디까지 일하실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매일 만나를 내려주심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양식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물이 없어 고통을 겪을 때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해서 저들과 짐승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 하나님은 “나의 행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광야의 40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날마다 경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면서도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묻기도 했습니다(출17:7).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토록 분명하고도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으면서도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 22절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부재, 곧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부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부재,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부재입니다. 이 불신앙이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계속해서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신앙의 결과 저들은 그 불신앙의 세대가 사라지기까지 40년이라고 하는 오랜 시간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를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 안에 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까? 이 믿음이 없음으로 인해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큰 이적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통해서 믿는 자입니다.
성도의 삶이 왜 불안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더 큰 능력을 보여달라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이는 믿음이 없음의 증거입니다.
Ⅲ.복음의 길을 이탈하는 자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본문 10~11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자들이 맞이한 결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한 자들이 맞이한 결과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서 당 시대에 편지를 읽는 자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들이 걸었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 시대를 살았던 불신앙의 이스라엘에 보이신 반응은 “노하심(προσοχθίζω)”이었습니다. 이는 극단적인 분노와 불쾌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대적자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거기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려고 저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저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하시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차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저 불신앙의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의하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입니다. 저들은 마치 술에 취한 자가 똑바로 걷지 못하는 것처럼 흔들렸습니다. 저들은 성령이 아닌 미혹하는 영에 의해서 끌려갔고 방황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왜 광야를 걸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이 광야에서 당하는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과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거역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저 불신앙의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번역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를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다면 “내(하나님)가 나를 벌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는 일만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저 광야 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참여할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불신앙했던 자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과 그 땅에서 누릴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결과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그 신비한 의미를 발견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자신들이 닥친 환경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도는 바로 이러한 자들의 모습은 과거 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경고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하는 구원의 완성, 또한 하나님께서 누리셨고, 예수님이 누리셨던 그 안식을 누리는 비결은 오직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 복음을 떠나서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엉뚱한 곳에서 이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그 구원과 안식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장차 누릴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우리는 기쁨보다 불평이, 소망보다 원망이 앞서고 있습니까? 왜 방황하십니까? 이는 분명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미혹의 영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깨어서 성령의 음성에 우리의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아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꾸만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참된 안식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은 지금 나에게 주신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