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無謀)한 도전(挑戰)
누가복음 5장 1~11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고자 해도 언제인지도 모르게 우리는 그 믿음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믿음 안에 있다고 말하는 우리가 생각해도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물며 저 세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우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한 것은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고전1:18). 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요, 그 십자가를 믿는 것이 미련한 것이요, 그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모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면 ‘깊은 사려가 없이 신중하지 못하다.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성이나 꾀가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모함의 끝에는 대부분 손해를 남기게 되고,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세상의 기준에서의 무모함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결과를 낳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을 받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의 선배라고 일컫는 많은 사람들이 무모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무모한 도전에 나서는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보면서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그의 순종하는 모습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에서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하는 것은 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본문 3절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 척, 곧 시몬의 배에 집중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배를 잠시 빌리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이에 시몬이 순종했고, 그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시몬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과 앞에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8절).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시몬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11절).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시몬 베드로의 무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보여야 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에게 “무모하다”라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과 함께 가는 도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는 베드로
본문 4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실 이는 몇 가지 모습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고, 시몬은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갈릴리 주변의 도시인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도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마13:55). 결국 예수님은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시의 보편적인 관습을 따라 목수로서의 청년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몬은 아버지로부터 어부의 삶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갈릴리에서 지금까지 고기를 잡는 어부로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한다면 갈릴리의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고기를 잡는 일에 대해서는 시몬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시몬은 밤에 새도록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다 동원해서 고기를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결과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몬이 어리석었다든지, 그의 경험이 얕아서 그러한 결과를 맞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는 시몬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는 일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지난밤에는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그의 어부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다음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뭍에 대고 다음 날의 일을 위해서 그물을 씻고 손질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그는 고단한 몸을 쉬면서 내일의 일을 위해서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금 배를 띄워 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지만 시몬 베드로가 무모한 도전에 나섰습니다. 본문 5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분명 시몬에게도 예수님의 명령, 곧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말씀은 비상식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이유를 묻지도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시몬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무모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무모한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결국 시몬의 무모한 도전은 상상 이상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본문 6절에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렇게 하니”는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행했을 때’라는 의미입니다. 시몬과 그 일행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대답한 후,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놀랄만한 결과는 낳고 말았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에 순종한 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시몬과 그 일행들이 그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지식이나 경험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에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였겠지만, 그분은 창조주요, 또한 통치하시는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그 주님의 능력이 시몬의 믿음과 순종이라고는 통로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비록 남들의 시선에서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습니다. 그에게는 결코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을 따라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내 생각대로, 내 경험대로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나의 삶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다만 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의 경험에 일치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기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통치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음으로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무모하다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어리석다고, 미련한 짓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살아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실 것입니다.
Ⅱ.예수님을 따라나서는 베드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시몬 베드로, 그리고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 앞에서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5절에서는 분명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ἐπιστάτης)”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예수님을 “주여(κύριος)”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저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일반적인 랍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임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참모습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잡힌 물고기를 보면서 그는 예수님이 일반적인 사람의 수준을 넘어선 분이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해 압도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여(κύριος)”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는 그 주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은 한낱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그분의 능력을 경험한 시몬은 예수님이 한탄 목수의 아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있는 자신은 “죄인”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8절).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 서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거룩하신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죄와 함께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몬은 예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하는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오히려 이 사실에 시몬은 두려움과 놀람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그리고 죄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두려워하여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시몬을 향하여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장 17절에서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시몬은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예수님은 그를 사람을 취하는 어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제부터 시몬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는 예수님은 시몬을 언젠가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로 삼으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었을 때, 즉 지금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제부터 시몬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일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는 시몬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를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신적인 명령입니다. 시몬에게 선택의 권한이 전혀 없는, 오직 순종하고 따라야만 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여기에서 시몬 베드로의 두 번째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18절에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저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본문의 그물은 지금까지 시몬에게 있어서 전부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삶의 전부요, 그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보장된 삶에 대한 포기입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발을 디디는 일입니다.
저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그의 삶에 보장된 것이 있습니까? 그의 남은 가족은 누가 책임을 집니까? 여기에 대한 대책이 있습니까?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에 대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명령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나섰습니다. 그 결과 그는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일에 얽매여 살던 인생이, 하늘의 일에 매여 사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가 지금 “주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표현은 안 하고, 때로는 부인하겠지만, 돈이 나의 주인입니까? 명예가 나의 주인입니까? 세상의 그 무엇이 나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 하루 입고, 먹고, 잠잘 것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과 내 계획을 앞세우고, 내 존재를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것에 얽매여 있을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좀 더 높은 차원을 추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모한 것 같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역사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목적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오늘 시몬 베드로의 모습이 무모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가 하는 일들이 무모한 도전이라고 여겨집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도전은 결코 무모한 일이 아닙니다. 가장 지혜로운 일이요, 가장 의미가 있는 일이요,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이 무모한 도전에 따라나서 보지 않겠습니까? 철저하게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도전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의 목적을 위한 도전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이 무모한 도전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입니다. 이 무모한 도전에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이 무모한 도전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