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9.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16)

  본문 : 행 17:29-31 

  제목 :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무조건 믿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믿음을 최고라고 하는지, 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인지를 바로 알고 믿습니다.

 

  또 사람들은 우리들을 우리가 아는 지식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인데 무조건 믿는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 사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여러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주주가 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죄가 있는 자를 심판하시고 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일의 증거입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뜻을 바르게 알게 해주시는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내 속에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것이 증거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시작 된지 2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사탄과 그 세력들이 무수히 그 증거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지만 진리를 거부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무신론자들이 우리를 비웃고 반대하지만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증거를 보고 증거가 있다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에는 확실하고 믿을만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본문 29절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이나 철학적인 면에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들의 신관이나 철학들은 아주 잘못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잘못된 신관을 이야기 하고 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앞 절의 말씀을 빗대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28절 하반절의 말씀에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전 300여 년 전에 아라투스(Aratus, B.C.331-240)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헬라 사람으로 천체에 관한 시를 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시 중에 “우리는 그의 소생이니”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도 그 시인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시의 구절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의 소생”이라고 할 때 ‘그’는 고대 로마의 최고신이라고 믿었던 ‘주피터’.(제우스와 동일 신)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피터가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믿었고 그들 자신들은 주피터의 소생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주피터가 참 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참 신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바르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그 시인이 말한 것처럼 신의 소생이라고 믿고 있고 우리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으로 믿는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생이라는 말은 자녀라고 번역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신이 창조하시고 지으셨다는 의미에서 그의 소생이라고 합니다. 너희들 주장대로 주피터 신이 인간을 창조했든지 우리가 믿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든지 어쨌든 신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어떻게 인간의 손으로 신을 만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을 동원하고 사람의 머리로 고안을 해서 만든 것을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인간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도 지으시고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에 힘입어서 살고 기동하고 존재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신을 만들고 신을 부리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신이라고 만들어놓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향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주 만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와서나 하나님을 믿는척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하나님을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로봇을 많이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청소로봇을 보았는데 너무너무 편리합니다. 가만히 두면 자기가 알아서 다니면서 청소를 한답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자기 스스로 자기 집에 들어가서 충전을 하고 나서 다시 청소를 한답니다.

 

  그런 로봇을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로봇을 너무나 지능이 좋은 로봇으로 만들다가 보면 로봇이 로봇을 만든 주인을 무시하고 주인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인간에게 반항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을 많이 합니다.  

 

  인간들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똑똑하게 만드시고 너무나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바로 배반을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조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고 나의 모든 것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증거들,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세상 만물이 이를 증언하고 과학적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본문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원칙은 죄를 범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시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내리신 그 원칙으로 인해서 죄를 범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수명을 정하시고 죄를 지어도 그 수명대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그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도 하십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모두다 그들에게 주어진 장수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지은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죄를 범하는 사람마다 바로 즉결 심판을 내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흉악한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해도 버젓이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오히려 더 잘 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간과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간과라는 말은 우리 사전에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김”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서도 그냥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것을 다 보고 계시지만 못 본 것처럼 그냥 넘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못 보시거나 몰라서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넘어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를 “알지 못하던 시대”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 주셨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나님을 알리시고 이방인들에게는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엄히 벌을 내리셨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관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시대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다 회개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아닌 세계 어느 곳이든지 다 회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퍼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다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거의 다 퍼진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를 하면 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벌을 내리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를 받고 더 복을 받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와서 이것저것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죄를 지어놓고 교회에 와서 잘못했다고 빌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그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알고 그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진리를 알면서도 진정한 회개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흉보는 사람들은 진정한 회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살펴보고 나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아는 사람은 남의 흉을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흉보고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그것을 말해서 고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사람도 진정한 회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환경을 핑계대고 이런저런 자기의 사정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간과하십니다. 못 본 척 하고 그냥 지나가십니다. 그렇다고 그냥 죄를 지으면서 살면 안 됩니다.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지 어떤 형편에 처한 사람이든지 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이 회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개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본문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악해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는구나,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심판 할 날을 정하셨고 그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에 그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빨리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는데 그 심판하실 분이 누구신가도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 정하신 사람으로 천하를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할 분을 정하셨는데 그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리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 대신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도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믿음만 가지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셔도 되고 구원을 하실 때도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말씀으로만 해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렇게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셨을까요?

 

  우리 같은 인간들이 감히 그 높은 뜻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짐작하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사형을 당할 흉악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셨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우리 모든 인간들이 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사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더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에는 너무나도 많은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증거들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믿음 이 위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다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