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2.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18)

  본문 : 행 18:1-4 

  제목 : 아굴리와 브리스길라.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로 왔습니다. 아덴이 그리스의 수도로 종교와 철학의 도시라고 한다면 고린도는 그리스반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의 우상숭배는 우상숭배와 함께 신전에 신을 섬기는 무녀들이 수천 명이나 있었고 고린도인들은 그 무녀들과 음탕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이라고 하면 음탕한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서 음탕한 생활을 하던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 안에 이런 것들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후일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데 주요 내용은 이런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도 행하지 않는 불의한 일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2:4)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과 그 아내인 ‘브리스길라’라는 사람을 만나서 고린도지역의 선교를 시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들 부부를 만난 바울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선교활동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같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이런 충성스런 성도를 만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비교적 안정된 교회로 성장하는 교회를 보면 어김없이 이런 부부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교회도 이런 충성스런 부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처음 개척했을 때 이런 부부들을 많이 만났고 지금도 이런 부부들이 함께 동역하기 때문에 교회가 운영이 되고 있고 복음을 전파하는 막중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본문 1-2절에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온 후에 그곳에서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도 이제 막 고린도로 온 사람이었고 바울도 지금 고린도로 왔는데 서로 만났다고 했습니다.

 

  아굴라는 본도애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유대인이었는데 부모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서 소아시아지방의 본도라는 곳에 와서 살다가 아굴라를 낳았습니다.

 

  그런 아굴라가 큰 꿈을 품고 당시 최고의 도시인 이태리 로마로 올라갔습니다. 소아시아 본도 같은데서 사는 것보다 로마에 가서 사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굴라가 로마에 와서 브리스길라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이미 로마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 가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들이 짐작을 하기를 아굴라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브리스길라는 자본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동업자가 되고 부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가죽을 가지고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해서 제법 성공을 거둘 무렵에 로마에서 큰 사변이 일어납니다. 글라우디오라는 로마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립니다. ‘크레스투스’라는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고 했습니다.

 

  이 추방령에 의해서 유대인인 아굴라는 추방을 당해여야만 했고 그 아내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남편을 따라서 로마를 떠났고 마침 여기 고린도에 와서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나라가 망한 이후에 근 2천여 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서 나라 없는 서러움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추방도 당하고 학살도 당하고 온갖 미움을 다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추방으로 인한 흩어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전초기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대부분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에서 바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었던 이 부부를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할 고린도로 미리 보내시고 힘을 합하여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바울의 사역에 충성을 다하여 협조했는지는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바울이 잊지 못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그런 동역자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두셨고 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일에 충성을 다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무책임한 부모님을 만나서 고생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무책임한 남편이나 아내를 만나서 행복해야하는 결혼생활이 불행해지는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무책임한 사장 때문에 무책임한 직원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여러 분야의 많은 책임들을 맡기셨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형제로서 자매로서 또는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이런저런 사명들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이런 사명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삶만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삶도 채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이런저런 임무들을 맡기셨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교회라는 공동체가 잘 운영이 되고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 일본에 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어떤 공장과 거래를 했는데 그 공장에 가서 본 현수막의 문구가 참 인상적이어서 돌아와서 우리 회사의 사훈으로 삼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가치가 있는 상품을 창조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 사훈을 “가치 있는 상품”이라고 정했습니다. 사장도 사장으로서 가치를 지녀야 하고 직원도 직원으로서 가치 있는 직원이 되어야 하고 상품을 취급할 때도 가치가 있는 상품을 취급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바른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 때의 각오가 목회에도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목사가 값어치도 하지 못하고 사례나 축내고 목사가 해야 할 바른 복음을 선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불행입니다. 목사 자신도 불행한 목사이고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제가 목사로서의 가치를 높일 때 제 자신도 행복하고 여러분도 행복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살기도 하고 저렇게 살기도 합니다. 무책임하게 살기도 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책임한 삶을 살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잘 완수할 때 보람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더 잘 완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기쁨을 줄 때 그 사람의 가치는 높아지게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서 가치가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고 헌신함으로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가치를 높이시기 바랍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본문 3-4절에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동역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함께 동행했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서 쫓겨나 아덴으로 올 때 거기 두고 나왔고 아직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 혼자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동행하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었고 고린도에 아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어서 혼자 일을 해야 하는데 거기 마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거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하는 사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천막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천막도 만들고 구두와 같은 가죽제품들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생업이 같았다고 했는데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언제 이런 기술을 배웠는지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지방의 부근에서 염소나 기타 짐승의 가죽이 많이 생산된 것으로 보아서 바울도 고향에서 그런 기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손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을 전통으로 생각했고 또 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한 가지 기술은 꼭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전통에 의해서 바울도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했지만 가죽을 다루는 기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동업자로 아굴라 부부에게 접근한 것은 그들 부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들 부부를 찾아간 것은 함께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계만방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천막을 만드는 일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이 중요한 일을 조금만 알려도 한 사람 먹여 살리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먹고 살기 위하여 스스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일을 통하여 교훈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무로 주신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인간이 벌로 받은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노동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참 좋은 것입니다. 노동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노동을 통해서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할일 없어서 빈둥거리고 놀게 되면 반드시 나쁜 생각을 하게 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정상적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또 이 일을 통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도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혹간에는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업 중에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잘 부흥시켜서 치부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소위 목회에 성공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부 목회자들을 보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고 보면 사례도 받아서 생활도 해야 하고 또 교회가 돈이 많으면 때로는 돈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제 때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과 타협을 하고 신사에 참배를 했습니다. 강요를 하기 이전에 앞장서서 일제에 협력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목사직을 그만두고 숨어서라도 신앙을 지켜야 했는데 그 자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 신사참배를 한 목사들은 회개를 하고 목사직을 반납하고 다시 시작을 하라고 했지만 그렇게 회개한 목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다들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들을 밥 목사 직업목사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직장을 위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신앙도 최소한의 양심도 저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른 목회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더 큰 교회 더 사례를 많이 주는 교회로 가려고만 했습니다.

 

  목회가 직업의 하나로 혹은 출세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여 교회가 부흥하고 거기에 맞게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교회성장에 유익한 것들을 설교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희생과 헌신은 사라지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는 목회가 될 때 교회의 본질은 사라지고 복음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양용근 목사님은 일본대 법대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목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큰 교회에 가려고 하지 않고 고향의 작은 교회들만 담임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논문을 쓰면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던 밤에 뒤에서 방청을 하던 양용근 당시 조사님과 손양원 조사님과 그 친구 들이 일본 헌병들에게 쫓겨나서 평양신학교 교회당에서 밤을 새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네 명의 친구들이 서약을 한 내용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지만 그 가운데 목회지를 정할 때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열악한 교회로 간다는 것과 가서 사례는 교회의 형편대로 최소한의 생활비만 받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양용근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나환자촌의 애양원교회에 차례로 시무하셨고 계속해서 작은 교회에서 시무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약속이 있는지도 최근에야 알았고 그런 약속과 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길을 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했던 지역의 교회에 왔고 사례는 평생 최소한의 생활비만 받았습니다. 

 

  제가 실력이 안 되니까 형편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감사할 것은 제가 이런 일을 통하여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약해서 순교자의 후손이지만 순교는 하지 못합니다. 아픈 것이 싫어서 병원에도 잘 안가는 사람입니다. 등치만 컸지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사는 것은 이력이 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하지만 이렇게 살아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삽니다. 오히려 못살수록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작은 희생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여러분이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후일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도 먹고 마실 권리가 있고 결혼할 권리도 있고 사례를 받을 권리도 있지만 이런 권리를 쓰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후9:12)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협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복음의 동역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한 충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