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2.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21)

  본문 : 행 18:12-17 

  제목 :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2.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사도바울이 유럽으로 건너와서 각 도시를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각 도시에는 대부분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이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풀어서 해석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소수의 사람들만 예수님을 믿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욕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내쫓았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방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더 잘 믿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의 선교여행을 보면서 바울이 지나온 도시들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지나온 도시들은 상업이나 교통이 발당한 도시들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예수님을 쉽게 믿을 만큼 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장사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즈음은 상도덕을 잘 지켜서 일부 나쁜 장사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직한 마음으로 영업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상인들 하면 나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거짓말이나 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들어가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더라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온갖 우상을 섬기며 나름대로 철학을 만들어서 바르게 산다고 했지만 그들의 종교나 철학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그런 종교나 철학을 통해서 자신들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교만한 사람들도 복음을 만나고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고린도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서 음탕한 생활을 하던 고린도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데살로니가나 아덴이나 고린도 사람들과 같이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악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산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박해하고 괴롭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적 착하고 바르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알량한 선행 때문에, 외형적으로 좀 착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자신이 부족하고 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오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집니다. 자신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되시는 분들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수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강하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역시 유대인들이 바울을 괴롭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아 법정에 세우고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그 재판 과정을 살펴보면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본문 12-13절에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죄목을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것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랑스러운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복을 받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들의 그런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르쳤고 율법은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목표를 바꾸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불가능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쉬운 방법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즉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선을 행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헛된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우리라도 바울을 이단으로 몰아서 내치고 로마법에 호소해서라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하면서 법정에 끌고 가서 고발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며 선한 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시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을 대면 잘 알만한 유명한 장로님이 한분 계시는데 이분은 기독교인들의 바르게살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입니다. 교회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이분이 나타나서 교회가 똑바로 살지 않으니까 욕을 먹는다고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이 나쁜 짓 하지 말고 똑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장로님을 아주 신앙이 좋은 훌륭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일 하는 단체에서 이분을 서로 모셔갈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그런 선한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바르게 산다는 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친 어리석은 사람이며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을 믿고 의지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의로움보다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교만한 사람이며 불쌍한 사람일뿐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 장로님처럼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유명한 교수가 되고 강연 한 시간 하고 수백만 원씩 받는다고 한다면 법을 어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착한 일 안하고 살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겠지요. 

 

  문제는 그렇게 출세하지 못하고 어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고 싶어도 환경이 허락하지 않고 좋은 일 하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고 먹고 살기에도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착한 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잘나간다고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착하게 살라고 훈계하며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제가 “위대한 믿음 진실한 고백”이라는 사도신경 강해를 책으로 내자 어떤 목사님이 그 책을 보고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십계명 강해설교를 해서 십계명을 잘 지켜서 천국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믿음이라는 책을 보고 그 앞에서 십계명을 지켜서 천국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아직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잘 모르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14-15절에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으로 데리고 와서 고발을 했을 때 당시 총독이었던 갈리오가 유대인들의 고발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면서 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갈리오는 아가야 지방에 총독으로 부임해 왔다고 했습니다. 고린도를 수도로 한 아가야 지방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에서 총독을 파견해서 다스렸고 갈리오가 총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리가 좋기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임 총독이 부임해 오면 비교적 쉽게 시민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참았다가 신임 총독이 오자 바울을 고발 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오 총독은 한 수 위로 두어마디 말로 고발을 받지 않고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무슨 부정한 일을 했거나 불량한 행동을 했으면 로마법에 의해서 내가 재판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도적질을 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폭행을 하거나 피해를 입혀서 국법을 어겼다면 고발을 받아서 법대로 처벌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고발을 하는 내용을 보니까 그런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희들의 신앙에 관한 문제이지 국법을 어긴 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같으면 믿으면 되고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 안 믿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주장하는 자체를 가지고 처벌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는 총독이 유대인의 억지 주장을 막기 위해서 신앙에 관한 문제와 윤리에 관한 문제를 구별하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교회에서 하고 법이나 윤리에 관한 문제는 세상 법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윤리 도덕에 관한 문제나 선행의 문제를 가르치고 행하게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마치 바르게살기 운동본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세상의 법에 다 있습니다. 십계명에서도 하나님께 관한 것들을 제외하고 인간관계에 있는 법들은 다 세상 법에 대등소이하게 나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적질 하지 말 것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 것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 하지 말 것 등은 성경이 아니라도 국법에 다 있습니다. 그 법을 어기면 세상 법에 의해서 다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꼭 교인들만 특별히 행하여야 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면 다 행하여야 할 당연한 것들입니다.

 

  교회에서 해결해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는 반드시 교회에서 그 정의를 내리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주제라는 것입니다.

 

  여기 ‘언어’란 앞에서 살펴본 ‘말씀’(λόγο)과 같은 단어입니다. 단순히 말씀이라는 뜻 보다는 진리, 이성, 논리, 법칙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 즉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법칙 등과 같은 일은 교회 안에서 논의해야 할 일이며 교회가 해결해야 할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을 때는 단순한 명령이나 지시사항이 아니라 심오한 진리가 들어 있는 소중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명칭’이란 ‘이름’을 말하지만 단순히 이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는 아주 특별한 이름과 그분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특별한 직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 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위시한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성경의 뜻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밝히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여기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바울의 주장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이 성경의 목적이며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교회가 결정하고 따라야 할 매우 귀중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르고 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인생들이 공히 해야 할 의무사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16-17절에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법정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난 유대인들이 그 화풀이를 회당장에게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바울 같은 사람을 회당에 들어오게 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한 화풀이로 보입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있는 회당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의 회당장은 그리스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온 집안에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문의 회당장 소스데네는 아마도 그리스보의 뒤를 이어 회당장이 된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전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데 대한 보복이거나 계속해서 바울을 회당에 들인 책임을 묻는 보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 악한 삶을 살던 이방인들은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바른 삶을 산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계속해서 핍박을 합니다. 욕을 하고 반대를 해도 안 되니까 나중에는 로마법정에까지 끌고 가서 벌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살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해야 될 일이고 어겼을 때 세상 법정에서 벌을 받는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착하고 바르게 사는 일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믿는 일입니다. 그 복음을 바로 알고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