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9.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22)

  본문 : 행 18:18-23 

  제목 :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18.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옛날에 시골 사람들이 사울에 올라오면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고 하면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컴퓨터 켜고 스마트폰 열고 수십 종의 신문도 보고 수십 개의 방송국 뉴스를 다 보아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보고 들었다고 그것이 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보다는 가짜들이 더 판을 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가짜뉴스라는 말이 공개적으로 나돌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보도했다고 그것이 다 진짜는 아니고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뉴스로 내보내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카더라 뉴스”라는 것도 있습니다. 잘은 모르는데 누가 그렇다고 카더라(하더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그냥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지고 사실처럼 전달하거나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라시”라는 것도 있습니다. 지라시는 일본말로 낱장으로 된 광고지나 선전지를 말합니다. 누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선전한 광고를 마치 대단한 사실처럼 이야기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장광고 허위광고들도 많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선전하는 약들을 보면 아플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건강 정보들을 보면 아플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선전이나 정보들이 허위가 많고 과장이 많습니다.

 

  모 텔레비전 방송에 가끔 반복해서 보여주는 “조작된 도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과 거짓 정보를 만드는 사람이 손을 잡고 CCTV 영상을 조작하고 증거를 조작해서 범인을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아무 죄 없는 평범한 사람을 억울하게 죄인으로 만든다는 영화입니다.

 

  이런 조작된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런 눈에 보이는 정보들 때문에 눈을 뜨고도 코 베임을 당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진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불신의 세상을 통해서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의의 기준은 “믿음”입니다. 사탄은 세상을 온통 불신의 세상으로 만들어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세상을 믿지 못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도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 하나님이라고 어떻게 믿겠는가, 성경도 복음도 내세도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냥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마음껏 즐기며 살자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고 교회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올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할 때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을 하셨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처럼 근거 없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기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을 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 성경이 등장하는 인물,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다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세의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당시의 중요한 사건 중요한 인물 중요한 도시들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 역사의 주제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지를 인간의 역사 안에서 진행하시고 그 진행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본문 18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18절에서 23절의 말씀에는 짧은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매우 긴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나온 도시들도 고린도, 수리아, 겐그레아, 에베소,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 갈라디아, 브르기아 등의 도시를 다녀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이 도시들은 대부분 당시의 유명한 도시들이었고 지금도 존재하는 도시들입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으로 배가 제일이었기 때문에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배를 타고 다녔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지역들을 다녔는데 주석가들은 바울의 전도여행을 1차에서 3차까지로 분류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전도 여행을 마감하면서 예루살렘의 교회에 올라가서 선교보고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상륙해서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라고 했는데 다른 사본에는 ‘올라가서’ 앞에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올라가’라는 말과 ‘교회’를 방문한 것으로 보아서 예루살렘은 주로 올라간다고 하고 교회는 예루살렘의 본부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교회 앞에 그동안 있었던 선교보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갔는데 안디옥은 아시는 대로 바울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입니다.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하고 그리고 다시 3차 선교를 떠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선교현황을 자세하게 기록을 한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이 들어간 경위를 설명하며 그 교회가 시작된 역사를 기록한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이런 성경의 기록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지역이나 인물이나 사건들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지명이나 인명들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말씀이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유행하는 카더라 뉴스나 지라시처럼 허위 과장된 것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사실이며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 믿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앞서 인용한 18절과 그리고 19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과 에베소에 와서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한 일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실인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민수기 6장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은 평생 혹은 일정기간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을 말합니다. 평생 나실인으로 산 사람은 삼손, 사무엘 등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에서 나는 소산물은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민6:3)라고 했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의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민6:6-7)라고 했습니다.

 

  나실인은 서원 기간 동안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여기 삭도란 머리를 밀 때 쓰는 칼을 말합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6:5)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서원한 것 때문에 머리를 깎지 않았다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이 나실인의 서원을 따른 것인지 그 서원은 언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나실인의 관례를 따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아마도 구약 나실인의 정신을 살려서 응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함에 있어서 각오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세계만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다를 각오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특별한 각오로 임했을 것이고 그것이 끝날 때 그 일의 끝을 알리며 머리를 깎았을 것입니다.

 

  또 본문에서 그가 한 일은 에베소에 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별로 좋아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거기서도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하여서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의 말을 듣고 헬라인들은 다수가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와서 바울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찾지 못하다가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달려와서 소동을 부려서 바울이 도망을 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붙잡아 법정에 세우고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회당에서의 좋지 않은 추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에 와서 다시 회당을 찾아갔고 회당사람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변론이라는 말은 이야기나 설교를 말하기도 하고 토론이나 논쟁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늘 하던 대로 그들이 보고 있는 구약성경을 해석하여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론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했던 설교를 했던 그들과 토론을 했든지 변론을 했든지 그 주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반대나 핍박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기회만 있으면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배우고 토론하고 논쟁을 해서라도 확실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고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믿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으로 형벌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전해야 하는 핵심복음이고 성도들이 믿어야 할 핵심진리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아주 강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의 마음으로 하면 그만이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이 복음을 전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나실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일에 쓰임을 받으려는 각오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말세가 되면 각오 없이 그냥 교회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정말로 진리를 알고 복음을 믿는 참된 신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결심도 없이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굳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니라

 

 

  본문 23절에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갈라디아와 브르기아는 소아시아지방 즉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갈라디아는 이미 바울이 1,2차 전도여행 때 전도하며 지나간 지역입니다. 이 소아시아지방을 다시 가는 이유는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는 감격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믿음이 변질이 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보면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점검을 하고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미처 가보지 못한 도시나 다녀와서도 더 할 말이 있을 때는 편지를 써서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했습니다. 그 편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편지를 우리는 서신서라고 하며 복음의 진리 믿음에 대한 교리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일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를 기록한 갈라디아서는 그 서신서들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바울이 가장 강하게 선언하는 말이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처음에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고 믿음이 힘을 잃게 됩니다. 교회 안에 이미 많은 거짓선생들이 들어오고 이단들도 판을 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떠나 다른 헛된 것들을 믿음이라고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로서 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 받을 사탄의 세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 복음의 진리를 중심으로 한 교리의 역사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순교자들의 역사입니다.

  

  이 귀한 복음으로 굳건하게 무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