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3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24)

  본문 : 행 19:1-7

  제목 :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배우면서 제일 크게 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쉽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오히려 반항을 하고 욕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내어 쫓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그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위시한 복음전파자들은 바른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바르게 자라도록 살펴보면서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그들의 믿음을 든든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 과정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고 선포하고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그 믿음을 바르게 알게 하기 위해서 믿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구약성경을 해석해서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막상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살기가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삶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주고 때로는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게 해줌으로서 믿음이 더 강해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과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좀 시원치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대답을 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다시 제시하고 세례를 받게 하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과정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본문 1-2절 말씀에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믿는다고 했는데 좀 시원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어봅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우면서 공부하기를 성령님께서 임하셔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주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제자’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같은데 성령님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을 받았냐고 묻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도 들어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할 때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그 제자들을 만난 때가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다가 고린도로 갔습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거나 말거나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이 누구 눈치보고 누가 있으면 복음을 전하고 없으면 말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 즉,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고 없을 때에 이 제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들이 아볼로가 말한 것처럼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복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듣고 알기 이전에 아볼로에게서 예수님을 배우고 믿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믿기는 하지만 자세하게 알지 못해서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는 아는데 자세하게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는데 바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다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자기가 판단하고 깨닫고 스스로 가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믿음을 정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배우면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진실 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가능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믿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참된 믿음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믿음의 고백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고백이 아니고 그 믿는 믿음도 다른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을 때 성령님을 받으셨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좀 혼동이 되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신 것 같기는 한데 성령님께서 오실 때 오신다고 말씀도 안 하셨고 오셨다고 해서 뭔가 다른 현상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지도 않아서 성령님께서 오셨음을 확실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내게 오셨는가,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방법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방법은 아니고 확실하게 확인하는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강 점검하고 살펴볼 방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서 가지게 된 믿음 같습니까? 그 믿음이 여러분 자신이 믿으려고 연구하고 노력을 해서 드디어 진리를 깨닫게 되어서 가지게 된 믿음 같습니까? 아니면 얼떨결에 그냥 믿음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까?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연구를 하거나 진리를 깨달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우연히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내가 연구하고 깨달아서 가지게 된 믿음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교회에 다니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우리 자신이 성경을 읽고 깨달아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즐거운 마음으로 오십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오기가 매우 싫습니까? 교회에 오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십니까?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교회에 올 수 없는 형편을 스스로 만드십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오시는 분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교회에 오려고 노력을 하시는 분들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분들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바르게 살려는 마음입니까? 죄를 지으려는 마음입니까? 죄를 지으면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마음이 아픕니까?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프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증거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른 진리를 따라 바른 복음을 믿는가, 바른 진리가 아닌 다른 복음을 믿고 따르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게 된 것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특별히 우리교회에 성도가 되어서 매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믿는 여러분은 다 성령님을 받으신 분들임이 확실합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본문 3-5절 말씀에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요한의 세례니라”라고 했습니다.

 

  세례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바울이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아볼로가 가졌던 믿음을 그들이 가졌고 아볼로가 받았던 요한의 세례를 그들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완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은 알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요한이 내 뒤에 오신다고 한 그 메시야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설명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그 바른 신앙고백을 통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세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도 대단한 세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또한 오실 예수님을 믿으며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구원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오실 예수님을 믿는 세례를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몸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본문 6-7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게 해 주셔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신앙고백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시고 일평생 변함이 없이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십니다.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은사들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그 은사들 중에는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방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순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나타난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사도들이 모국에로 말을 했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 자기나라말로 들리는 방언입니다. 베드로사도가 설교를 했을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방언을 하는 자기 자신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말을 함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알게 하는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좀 유치하고 문제가 많아서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방언은 하지 말라고 한 방언입니다. 어쨌든 이런 방언을 통해서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체험이 없이 지식으로만 믿을 때 그 믿음은 흔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를 알려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내일일은 모르고 사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들은 불행한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 불행을 미리 알고 사는 것은 비극입니다. 사고를 당하는 것이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미리 안다면 무척 괴로울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언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에 관한 것을 약속해주셨는데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방언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방언을 하는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배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에게 몇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말하는 것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더 나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모든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말로 어설프게 예언을 하는 것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래 일을 보고 삽니다.

 

  비록 우리가 신비하고 기적적인 은사의 체험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강하게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체험을 통하여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통해서 바른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동행하심으로 기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잊지 말고 성령님께 의지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