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27)

  본문 : 행 19:17-20

  제목 :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것은 우상 숭배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나름대로 자기가 믿는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을 알려주어도 거부합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자마자 접근하여서 유혹을 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고 사탄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 사탄의 종에서 이끌어내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하십니다. 그동안 사탄의 종이 되어서 저질렀던 온갖 죄악에서 용서를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원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게 하시고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구원의 복음,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펴져나가는 것을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방해공작이 초대교회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우리나라의 상황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일부 벼슬아치들과 양반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백성들은 오늘날의 노숙자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온갖 미신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에 가면 산신령 바다에 가면 용왕 여기저기 온갖 잡신들을 다 섬기고 있었고 죽은 조상도 귀신으로 알고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건너온 유교나 불교 등의 종교도 결국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을 가장 잘 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가난하고 못살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이런 잘못된 종교와 각종 미신에서 돌이켜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게 함으로서 천국백성이 되게 하였고 또 이 세상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양용근 목사님이 짧은 목회 활동 기간 동안 미신타파에 중점을 두신 것은 우리나라 조상신을 섬기지 않아야 일본 천황신도 섬기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잘 살게 되려면 온갖 미신이나 우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시대에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어서 사탄과 그 졸개들이 만든 미신이나 우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만 섬기게 함으로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강을 주시는 유일한 것임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능력을 행하게 하시자 심지어 바울이 쓰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병든 자에게 갖다가 얹으면 병도 낫고 귀신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 떠돌이 유대인 마술사들과 제사장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으나 귀신이 알아차리고 내가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고 하면서 마술사들에게 달려들어서 때려눕히고 알몸으로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알고 나서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로 정했습니다. 이 일을 알고 난 후의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본문 17-18절에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알고”에서 “이 일”이란 넓게는 우상숭배의 헛됨을 알고 나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쓰던 앞치마나 손수건만 갖다 얹어놓기만 해도 도망쳐 나가는 그런 연약한 신을 섬겼다는 것을 알고 나서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름대로 신을 만들어서 섬겼는데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섬기는 것에 대한 잘못을 알고 나서입니다. 예수님도 잘 모르면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잘 모르면서 무당이 외우는 주문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과거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기는 하는데 그 마음속에는 그저 산신령과 같고 용왕을 섬기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불교나 유교에서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믿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능력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행하는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마술사들이 무당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거짓 이적을 행하려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처럼 엉뚱한 일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거짓 선생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나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선행이나 인간의 고행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불교나 유교의 영향이 아직 우리들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방언이나 신유은사나 예언의 은사 같은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미신을 섬기던 무속신앙이 우리들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에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두려워하며”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그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자신들이 행한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인용한 칼빈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 바울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큰 잘못이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시지도 않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바울이 가르쳐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일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때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높이고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이 다르지 않고 그 말이 그 말이겠지만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한 것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해주셨는데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높이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저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 이런 교훈을 주신분이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편이 되어 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셔서가 아닙니다. 그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초창기 때 송명희 시인이라는 사람이 와서 간증을 하고 간 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고개도 마음대로 들 수 없는 뇌성마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고 그 예수님을 시로 노래로 만들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가 만든 노래 중에서 “그 이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예수님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이름을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름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될 것입니다.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 일을 알고 나서 한 일이 “자복하며 행한 일을 알리고”였습니다. 자복했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동안 자신들이 잘 못했던 일들을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유대인 무당들이 잘못한 일들 그래서 창피를 당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자복하고 알린 사람들을 “믿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거부터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자복을 했다는 것은 잘못 믿었던 것에 대한 회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을 잘 몰랐고 예수님을 믿었으되 그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이단 같은 유대교 무당들이 하는 일에 동참을 하고 은근히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런 잘못들을 공적으로 회개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림으로 다시는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19-20절에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이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면 19절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마술사들이 회개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회개한 후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지 그냥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았는지는 분병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살았던 것을 버린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읽고 따랐던 마술하는 책을 다 모아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태웠는데 그 값을 계산해보니까 은 5만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화폐는 헬라인들이 쓰는 ‘드라크마’가 있었고 로마인들이 쓰는 ‘데나리온’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가 은 5만이 드라크마인지 데나리온인지 밝히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두 화폐의 가치가 비슷하여서 무슨 단위를 쓰든지 별 차이는 없습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일당이 1드라크마 혹은 1데나리온이었기 때문에 은 5만은 노동자가 5만일 동안 즉 137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돈이기 때문에 엄청난 액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돈을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살았는데 그것이 헛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임을 깨닫고 난 후에 그 아끼던 것을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는 것은 그것과 상관이 없이 힘이 있는 말씀이고 그것과 관계없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힘이 되고 흥왕하고 세력을 얻게 된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잘못된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단이 있을 때 그 말씀들이 나에게 힘과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계속해서 배워왔습니다. 그것을 알고 배우는 것을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았으면 이제 그 믿음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일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진실한 고백이란 신앙고백을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진실한 고백은 우리의 삶이 따르는 고백입니다. 그동안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다 불태워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취미생활이든지 그것이 먹고 사는 일이든지 그것이 재물이든지 그것이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에 방해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이 나를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내 삶의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없애버릴 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복음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우리의 각오를 통해서 결단을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점 더 흥왕하여지고 세계만방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을 알고 나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 이름만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고 나서 그들이 취한 행동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높였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공적으로 회개하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알고 가졌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힘이 있게 흥왕하여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이런 사실을 잘 배워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을 위해서 세상의 좋아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세계만방에 전파되도록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