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97)

본문 : 행 15:25-26

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2.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보람 있게 생각하는 일 중에 하나는 초대교회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일들이 우리 교회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은 초대교회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많이 다른 것은 발전해 나갔다는 긍정적인 면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변질이 되었다는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변화의 긍정적인 면은 교회의 조직이나 예배의 형태나 전도나 선교의 방법이나 성도들의 삶이나 이런 실천적인 면에서의 변화입니다. 세월의 흐름이나 환경의 변화나 인간들의 삶의 진보에 따라서 더 좋은 모습으로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와 다른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과 그로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하나같이 이것을 위해서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까지도 버렸습니다. 그들이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키고자 했던 그 교회의 본질적인 진리가 변질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변질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인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변개시켜서 복음을 믿는 믿음이 아닌 행함이나 다른 것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보다 이 세상의 성공이나 행복을 더 강조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제가 주일마다 이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제 생각이나 사상 때문이 아니고 성경 말씀이 어디를 보나 이 복음이 강조되어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너무 귀하고 너무 크고 너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에서 믿음과 행함에 대한 결정 사항을 기록하여 안디옥을 비롯한 여러 이방나라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부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천명한 매우 중요한 서신을 가지고 가는데 동행하는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평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행함을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는 행합니다. 그리고 그 행함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하는 행함, 즉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생명을 아끼지 않는” 행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 성경의 말씀처럼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가,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의 보편적인 생각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되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기 믿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교회라고 단서를 단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을 우선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도 있고 엉뚱한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이단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엉터리 교회들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포기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것은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의 복음에 관한 작은 차이들에 대해서 성경을 살펴보면서 무엇인 중요한가를 알고 바른 진리의 길로 가자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개혁주의 교회에 있는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진리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 믿음에 따르는 행함에 대해서 작은 차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삶이 좀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삶이 요구 되고 행함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그 삶이나 행함이 무엇을 위한 삶이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는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구약시대 사람들이 실패했던 그 율법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나바와 바울의 행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도 당연히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행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는 행함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한 마디로 구원입니다. 이 이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당면과제는 죄에서 죽음에서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아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구원이라는 엄청난 일을 하실 때 다른 이런저런 것들을 다 배제하시고 오직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다른 부스러기 쳐다보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까봐 이 중요한 핵심인 구원에다가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입니다. 이 이름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가를 알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주님이라는 말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라는 말은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가 되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든지 선한 일을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행함이 믿음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우리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이 중심이 아니라 행함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그 이름의 뜻을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들이 지은 죄에서 그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믿음에도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행함을 통해 죄에서 구원이 아닌 이 세상의 어려움들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야를 헬라어로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이렇게 모든 이름이나 직책이나 별명들이 다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을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율법을 행하고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율법을 배우고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형식적으로 조금 지키고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켜놓고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망했는가를 기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려다가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켜서 의롭게 되려다가 오히려 그 율법에 의해서 정죄된 사람들입니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왕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거나 율법을 바르게 지키지 못해서 책망을 받거나 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나마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그들이 가진 믿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했습니다. 모세나 다윗이나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함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실패했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그런 행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는 믿음을 위한 믿음을 통한 행함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자신의 행함을 가지고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거나 자기의 의처럼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비교적 좀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착각입니다.

 

그런 선행이나 그런 정직함이나 그 정도로 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가 행하여야 할 기준의 천분의 일도 만분의 일도 못되는 아주 극히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그런 선한 일을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에 불가능한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타락한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타락한 인간들은 선한 일 조금하고 착각하기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빠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런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쉽고 빠른 구원의 길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행함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이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고백하기 위한 최고의 행위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찬송이나 기도가 신앙고백이고 선포되는 복음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복음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실한 고백 없이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또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도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행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란 구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았고 그 혜택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삶이 아무렇게나 살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바르게 살거나 선을 행하거나 좋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나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그 외의 모든 제자들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애를 바쳤고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았던 그 위대한 믿음을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율법을 행하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런 것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기본이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십일조 헌금을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바치고 생명까지도 바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엄청난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것보다 우리가 가진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드 것을 다 바쳐도 우리가 받은 그 은혜를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다른 의무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면 됩니다.

 

구원을 주는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