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06)

  본문 : 행 16:24-28

  제목 :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매.

 

  “24.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가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도행전을 통하여 교회의 본래 모습과 복음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 본질적인 것 외에도 이런저런 특별한 일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의 활약상입니다. 두 사도가 경쟁하듯이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서로 비슷한 부분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면, 사도 바울도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베드로 사도가 죽은 사람을 살리면, 사도 바울도 죽은 사람을 살립니다. 베드로 사도가 귀신을 쫓아내면, 사도 바울도 귀신을 좇아냅니다.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을 하면, 사도 바울도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합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를 동일선상에 두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은 조금은 의도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중심으로 베드로 사도가 중심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하면 후반부는 온 세상을 향하여 바울이 중심이 되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제자인 반면에 바울은 그때 예수님께 직접배운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아닌 바울이 복음전파의 주역이 되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되고 기독교의 교리의 집합체인 서신서 중 거의 대부분인 13-14권의 서신서를 바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동일한 사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신을 쫓아낸 후에 감옥에 붙잡혀 들어가는 것도 동일하고 두 사람이 다 감옥을 빠져나오게 되는 것도 동일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니까 사탄이 그 졸개들을 동원해서 복수를 하고 있는 것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꼭 같은 것은 아닙니다. 큰 그림으로는 비슷하지만 그 상황전개는 서로 많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전개하시면서 억지로 하시지 않으시고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진행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늘 똑 같은 방법으로 일을 하시면 사람들이 그대로 배우려고 하고 그대로 흉내를 내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냐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그대로 해보려는 심사입니다. 그대로 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감옥도 탈출해보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과 실라가 귀신을 쫓아 낸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통해서 돈을 벌던 사람들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된 것이 분하여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감옥에 넣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바울과 신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니까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다 열리고 채워둔 차꼬가 다 풀어졌다고 했습니다. 잠을 깬 간수가 이런 상황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을 한 줄 알고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자결을 하려고 하니까 바울이 소리를 질러서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으니까 자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바울과 신라가 기도한 것과 찬송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린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본문 24-25절에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과 실라가 왜 감옥에 가게 되었나를 말씀 드렸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로 인해서 돈을 벌던 사람들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고발을 하여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사탄을 떠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제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시비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온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기도를 하고 찬송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 하다가 감옥에 들어온 일이 억울해서 원망하고 불평을 할만도 하지만 원망이나 불평이 아닌 기도와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1)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기도라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호흡괴도 같은 것이고 성도들만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기도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를 해야 좋을지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해야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늘 기도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한번 기도할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를 언제 해야 되는가 새벽마다 하는가? 철야기도를 해야 하는가?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해야 하는가? 문제가 없어도 기도해야 하는가?  또 기도 장소나 기도 내용이나 기도의 순서나 기도의 응답이나 이런저런 기도에 대한 궁금증이 참 많습니다. 기도하면 다 응답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기도한다고 다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기도란 이렇게 때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옳다고 꼭 말할 수는 없지만 원칙은 바르게 알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라고 해도 기도를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바르게 하는 것이 더 유익을 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마음의 소원을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항상 소원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먼저 드려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 없나를 살펴보고 회개를 하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기도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하는 기도는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자신을 살피고 잘 못된 것을 회개하는 것도 많이 하면 할수록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도 유익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무엇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최소한도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의 탐욕 때문에 잘못된 것을 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면 안 되는 것들을 잘 모르고 달라고 조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실리가 기도한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뭐라고 기도를 했기에 이렇게 금방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왔을까요? 그 기도가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원리를 알고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누가가 기록을 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기도의 내용보다는 그들이 기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연유로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기도한 상황입니다. 좋은 일 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잡혀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흉악한 사람들을 가두는 깊은 감옥에 가두고 차꼬를 채운 상태였습니다.

 

  차꼬라는 것은 나무나 쇠사슬로 된 형벌도구를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긴 나무판자로 목을 넣을 구멍만 뚫어서 죄인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는 도구가 있는데 그런 것을 차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쇠사슬로 다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도 차꼬라고 합니다.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죄수들이 꼼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였으며 그냥 차고만 있어도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기도를 했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아버지하고 부르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 들으시고 조취를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에 찬 기도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셨으며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지금 사탄의 방해공작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풀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큰 확신은 자신이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실은 복음을 전할 사명만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서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 때의 믿음이란 내가 기도하는 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말하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이런 바울이 가졌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고 내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믿음을 가진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삶에 연연하고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가 이루진다는 확신을 가진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되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믿음의 기도라고 합니다.

 

2) 하나님을 찬송하매

 

  바울과 신라가 기도를 한 후에 찬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기도가 끝난 후에 한 찬송이 아니라 기도와 연결이 되는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기도에 곡조가 붙게 되고 기도가 찬송으로 변했습니다. 찬송은 곡조가 붙은 기도라고 합니다. 노래로 부르지만 그 내용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기도에 곡조를 붙여서 마음의 감정을 담아서 찬송으로 부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를 때 다른 죄수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한 밤중에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면 남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하게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바울과 실라는 아주 큰 소리로 들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미 기도와 찬송 후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과 신라가 조용히 기도하고 찬송했다면 그 다음에 일어난 지진이나 옥문이 열리는 기적들이 우연한 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기도하고 큰 소리로 찬송한 후에 이런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송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한 후에 필요한 것들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주시고자 하실 때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기도하려는 마음을 미리 주시고 그 마음으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큰 소리로 찬송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찬송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우리의 찬송입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본문 26-28절에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진은 흔한 것이고 지중해 연안에 있는 빌립보 지방이기 때문에 지진이 가끔 나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우연한 지진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아예 이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지진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을 없애버리는 일도 간단하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주의 천사가 조용히 와서 옥문을 열고 간수들 몰래 탈옥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차꼬가 풀리고 하는 떠들썩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떠들썩하게 일이 벌어지게 한 것은 바울일행을 탈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다가 깨 간수가 이런 현상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을 간 줄 알고 칼을 빼어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를 말리며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 바울과 신라는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로인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는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배울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서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와 찬송을 불렀고 그 기도와 찬송은 기적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그런 기도와 찬송을 통하여 우리 주변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크게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