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1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10)

  본문 : 행 17:4-9

  제목 : 다른 임금 곧 예수.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위대한 믿음 진실한 고백”은 제 책 제목이긴 하지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정말로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최고의 최상의 것을 가질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가지고 있지 않은지는 그 사람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 고백이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엉뚱한 것을 가지고 잘못고백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으로 진실한 고백을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나 장이 좋지 않으면 요즘은 의술이 발달을 해서 위나 장 안으로 카메라를 집어넣어서 속을 들여다 롤 수가 있습니다. 위내시경이나 장내시경을 통하여 위나 장에 상처가 있는지 암이 자라고 있는지를 살펴서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우리의 뇌나 마음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보려고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성과가 없다고 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같은 것을 만들어서 활용을 하려고 합니다. 말할 때 심장이 어떻게 뛰는가, 눈동자가 어떻게 바뀌는가, 뇌파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이런저런 것을 가지고 마음속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별로 신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본마음은 감추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발달을 해서 더 많은 거짓말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에 진심을 알 수 있는 것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모드가 거짓말을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구글 트렌드를 연구한 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이 분이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보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했다고 밝힙니다. 페이스북 같은 자신을 드러내어놓는 곳에서의 말하는 것과 구글 검색 같이 자신을 드러내어놓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말하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데서 인간의 거짓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페이스북이 뭔지 구글이 뭔지 잘 모르시니까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면 페이스북은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곳이고 대부분은 자기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구글 검색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곳입니다.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들인데 그 내용은 엄청나게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을 보면 사람들이 다 착하고 좋은 일을 하고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바르게 사는 것 같은데 구글을 보면 사람이 바뀌어서 온갖 추접하고 나쁜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남들이 보는 가운데서는 착하고 바른 것 같지만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는 악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거짓말이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들어 있지 않나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우리의 믿음은 위대한데 그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하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만 하는 거짓말이라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해도 교회에서 하는 신앙고백만큼은 진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을 전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한 복음을 믿고 따랐으나 어떤 사람들은 극렬하게 반대를 하고 배척을 했습니다.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는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 예수님도 잘 믿을 것 같지만 반대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비방을 하고 반대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그들의 거짓말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본문 4절에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 “그들 중 몇 사람이 믿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으며 또 수많은 경건한 그리이스 사람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믿었다.”라고 번역을 한 것으로 보아서 복음을 듣고 따른 사람이 세 부류인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고 구약성경을 가지고 설명을 하고 전도했을 때 유대인 중에도 몇몇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고 수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이방의 온갖 우상을 섬기던 헬라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섬기는 신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드릴 확률이 적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헬라인들을 경건한 헬라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건하다는 말은 예배를 드린다. 경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헬라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회당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미리 이들을 회당에 들어오게 하시고 성경공부를 하게 하셨다가 그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여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교회에 오게 하시고 성경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율법을 지키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제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선행을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여기 귀부인은 아마도 데살로니가를 다스리는 관리들의 부인인 것 같습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거나 권력도 없는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도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특별한 계층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늙고 병들고 죽어가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잘 몰라서 세상에서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살지만 사실은 원래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본문 5절에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라고 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도 잘 몰랐던 헬라인들은 사도바울의 설명을 듣고 곧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렇게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처럼 행세를 했는데 그동안 그렇게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랑했는데 그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고 성경을 줄줄 다 외우면서 살던 사람들이 성경의 핵심을 말해주었는데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에 의해서 교회를 개혁할 때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성경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교리를 만들어서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을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타락한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런 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으로 돌아가기는 했는데 성경의 엉뚱한 곳으로 돌아간 엉터리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긴 했는데 성경의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똑바로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라고 설교를 합니다. 아무리 똑바로 살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긴 했는데 성경의 세상축복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기 위한 교과서인 것처럼 이야기 하고 믿음을 이 세상의 부로 연결을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긴 했는데 성경에서의 기적이나 은사로 돌아갑니다. 성경에서 일어난 기적을 왜 우리는 못하느냐고 하면서 똑 같이 기적을 일으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성경을 알면서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유대인들의 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설명하자 그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바울과 실라를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시기하다’는 말은 원래 ‘뜨겁다’라는 단어에서 온 말로 ‘열심을 내다’, ‘노력하다’라는 뜻입니다. 열심을 내다가 보니까 시기가 생기고 질투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때로는 시기나 질투로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없어서 바울과 실라를 시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다가 보니까 바울과 실라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단을 하여 바울과 실라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목사들이 열심히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더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고 더 많이 충성을 하여서 복을 받고 칭찬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잘못되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시기하게 됩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성경에 있는 대로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니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정당화 시키면서 잘못된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이 정말로 정당한 일이라면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토론회를 한다든지 유대교 원로들을 모으게 하고 연구를 하게 하든지 좋은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그들의 열심 때문에 동네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성도의 집을 습격하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려고 합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해서 복음을 막으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이단이나 거짓선생이나 잘못 된 지도자들도 그들이 가진 열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이나 거짓선생을 따르는 사람들도 보면 대부분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더 잘해보려고 복을 더 많이 받고 충성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다가 보니까 잘못된 길로 갑니다.

 

  열심을 내는 것보다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바르게 믿고 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본문 6-9절 말씀에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과 실라를 잡으려고 야손에 집에 불량배들을 데리고 가서 찾았으나 거기 바울과 실라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야손과 그 형제들을 붙잡아 읍장 앞에 끌고 갔습니다. 야손의 죄명은 천하를 어지럽히던 사람들을 자기 집에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단정하고 그들을 따르는 야손과 그 형제들을 그런 나쁜 사람들을 영접한 죄로 고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어기고 가이사 외에 다른 임금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가이사만 로마의 왕인데 예수님이 왕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를 따르는 야손과 그 형제들을 반역자로 고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국법에 의해서 벌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최고의 야비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영원토록 세상 만물을 다스릴 영원한 왕이십니다. 단지 그들이 말하는 이 세상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아닙니다. 로마의 가이사 자리를 빼앗으려는 그런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나라의 왕이 아니시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시고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죄에서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고 믿음을 바로 알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따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