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212)

  본문 : 행 17:16-18

  제목 : 바울이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 때문에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급하게 떠나온 장면을 보셨습니다. 그 때 바울만 먼저 빠져나오고 함께 갔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베뢰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떠나오면서 자신을 인도했던 사람들에게 가서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자기에게 오게 하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거기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와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벌어진 일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기다리면서 아덴이라는 도시를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이라는 도시에 가는 곳 마다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바울의 마음에 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여기 아덴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우상숭배자들과 논쟁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 많은 논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몇 사람만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러 가지 논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중심적으로 한 말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논쟁하면서 한 핵심적인 말이 예수님과 부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본문 16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라고 했습니다.

 

  아덴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그리스 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이 그리스 신화일 것입니다. 그들이 온갖 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 신을 실지로 있는 것처럼 믿고 섬겼습니다. 어떤 역사가가 당시 아덴의 우상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덴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신을 만나는 것이 더 쉽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우상이 있는 도시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부당성을 이야기 하고 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이 신화를 만들어서 섬기는 것을 보면 어디서 많이들은 것 같은 이야기들도 더러 있습니다. 결국 신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 참 신이신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옛날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가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신으로부터 인간을 다스리는 신 이런저런 신들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실상 그 원래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나누어서 이신 저 신에게 맡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각 신에게 가서 빌어서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들은 다 가짜거나 사탄 마귀 귀신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이런저런 우상들을 만들어서 그 신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살려고 했습니다. 제일 많은 영향력을 끼친 우상은 조상신을 가장한 귀신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믿고 그 귀신이 자기가 죽은 날에 자손에게 밥을 얻어 먹으로 내려온다고 믿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안 드리거나 성의 없이 드리면 바로 탈이 납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든지 사고가 나든지 해서 벌을 받게 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귀신이 됐다면 자식들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지 제사 한번 소홀하게 지냈다고 벌을 주는 것은 조상이 아니라 사탄의 졸개들이 하는 짓입니다. 조상 제사뿐입니까?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고 물에 가면 용왕이 있고 이런저런 신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신구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력 정월 초순경을 전후하여 일주일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집안의 신들이 천상으로 올라가서 일을 보는 시간이랍니다. 이 틈을 타서 귀신 눈치 보면서 하지 못한 일들을 얼른 하는 기간입니다. 이사를 가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할 때 날을 받고 무당에게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 때는 마음대로 해도 귀신이 감시를 안 하니까 괜찮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사를 갈 때 이 기간 동안에 가니까 제주도는 이때가 이사기간입니다.

 

  양용근 목사님이 일제 때 일본의 신인 신사참배도 반대하셨지만 그 이전에 목회를 하시면서 중점을 둔 것은 우상숭배를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망하고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은 이런 우상을 섬기는 것 때문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거나 이런저런 미신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우상들을 먼저 타파해야 일본의 신사참배도 거절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지붕 없는 집이며 긴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 그런 것은 우상숭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 즉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자에게는 훈련을 시켜서 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해 주시고 또 교만한 마음이나 잘난척하는 것도 징계를 통하여 훈련을 통하여 고쳐주시지만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철저하게 멸망시켜버리십니다.

 

  문제는 이런 우상숭배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우상숭배 하듯이 섬깁니다. 제물을 바쳐서 죄를 탕감 받고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기도해서 점치듯이 내일 일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자식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 있는 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우상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이런 우상들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최고가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본문 17절에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덴에 도착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찾아간 곳이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덴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변론을 했습니다. 또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과도 변론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변론을 했습니다.

 

  변론 내용은 기록을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바울이 아덴에 우상이 많은 것을 보고 격분했기 때문에 이런 우상들의 허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그 외에 모든 신은 헛된 신이며 거짓 신임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난 사람들이 거짓으로 신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거짓 신이지만 그 신을 참신으로 믿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 참 바보같이 속고 있는 것이 보이는 데도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지만 다 어리석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니면 진리를 알 수 없고 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로마서나 에베소서 강해설교를 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깊이 알고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심각하게 느끼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듣고서도 이해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믿음을 그저 신앙생활로만 알고 바르게 살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복음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의미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가 로마서를 5백독 정도 했으니까 백독만이라도 하고 난 후에 논쟁하자고 말하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박사학위를 받고 책을 내고 하니까 조금씩 제 말을 수긍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만나면 복음에 대해서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울분의 토하며 이야기 하는 바울의 심정을 저는 이해합니다. 큰 교회, 수많은 성도들, 화려한 강단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하고 있는 일부 잘못된 목사들과 한번 만나 논쟁을 해보고 싶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엉뚱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서 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논쟁을 하고 싶습니다. 세상 풍습에 젖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면서 이 복음의 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싶습니다. 논쟁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왜 성경의 핵심인 복음을 모르는지 왜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지 아니면 왜 알면서도 다른 이야기만 하는지 한번 따져보고 싶습니다.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본문 18절에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아덴에는 우상들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오한 문제를 연구하는 철학자들도 많았습니다. 당시에 아덴을 대표하는 철학의 두 학파가 본문에 등장을 합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두 학파가 등장합니다. 당시의 철학은 엄청나게 연구를 많이 한 심오한 학문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사상을 다 이해하고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저 당시에 사람들도 그냥 무식하게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을 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것은 의논이라든지 추리를 가지고 행복을 획득하려는 시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쾌락은 육신적인 저급한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면서 고상한 행복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과 입고 살 것만 해결이 되면 행복해 하는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물 흐르는 대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라.”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따라 살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무신론입니다. 인간이 신을 섬김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저런 신들을 만들어 섬김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이고 자신들은 스스로 행복을 찾는 지식인임을 자부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런 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입니다. 철학보다 더 소중한 성경도 학문으로 많이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의 진리를 발견한 것은 그런 철학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한 그들과도 당당히 논쟁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철학으로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학이라는 학문은 최고의 학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은 상식이라고 합니다. 일반 상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을 학문으로 과학으로 밝혀냅니다. 일반 학문으로 과학으로 밝혀낼 수 없는 분야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에 관한 지식이 가장고상하고 귀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학자들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령님을 통하고 알고 믿는 이 믿음이 최고의 지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행하는 최고의 예식인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이 예식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 공로로 이 예식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지식을 가진 최고의 의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들만 참여하는 귀한 예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먹게 될 떡은 날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시게 될 포도주는 날 대신 흘려주신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자는 하나님께서 피로 세우신 새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울이 전한 예수님과 부활을 상징하는 이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부활이 우리가 가지는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