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83)
  본문 : 행 13:44-48 
  제목 :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더라.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서로간의 갈등문제일 것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 남녀 간의 갈등, 지역적인 갈등, 이념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빈부간의 갈등 등 이런저런 갈등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간에 의견 차이가 없이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갈등들이 서로 봉합되기 보다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가진 생각이 너무나 확실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양측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종교 간의 갈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타종교간의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한 분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교나 천주교나 기독교 간의 갈등도 대단합니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가 가진 교리의 갈등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도 그 해석은 서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왜 이런 갈등이 있는 것일까요? 서로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서로가 자란 환경의 차이, 서로가 배운 지식의 차이, 서로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의 차이 이런 저런 생각의 차이 때문에 갈등이 심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은 타고난 신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은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어떤 사람은 사탄의 종으로 태어납니다. 이런 엄청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엄청나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고도 똑 같은 말씀을 듣고도 서로 생각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런 서로 다른 모습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안식일에 사도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는지 그 다음 주 안식일에는 안디옥 시의 거의 모든 시민이 그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왔다고 했습니다.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시의 모든 시민들이 몰려왔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큰 회당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몰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사람들이 전부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기독교의 교회를 시작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성도로서 살아갔더라고 결론이 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는 시기하여 비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지만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차이를 본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고 앞서 비방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기하여 비방하는 자들

 

  본문 44-45절 말씀에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이방인이라고 해도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서 구약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바울을 청하여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몰려온 사람들은 안디옥에 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듣고자 하여 몰려왔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 좋아해야 할 텐데 왜 시기를 하는 것일까요? 원래 타락한 인간의 습성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기 보다는 기분이 나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요즘은 사촌이 아니라 친형제가 논을 사도 배가 아파하는 세상입니다.

 

  평소에 자기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긴 이방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니까 그것도 아주 쉽게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니까 배가 아파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난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배운 39절 말씀에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동안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했으나 그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반박하고 비난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도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과 반박이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난과 반박이 유대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교회 안에서 비난을 받고 반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칼빈이나 루터 같은 교회의 개혁자들이 가장 앞세운 교리입니다.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반박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말씀을 앞세우고 교회를 개혁하여 우리 개신교가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 안에서 천주교가 주장했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다시 나와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비난하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난주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우리교회는 모든 날들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다른 행사를 하지 않았지만 개혁주의 교단에서는 많은 행사들을 했습니다. 우리 교려신학대학원에서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이신칭의에 대한 교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입장”을 정리해서 총회와 전국교회에 교단 신문을 통하여 밝혔습니다. 이 주장에서 “이신칭의는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 성취된 복음의 핵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칭의론은 개혁교회를 태동시켰을 뿐 아니라 지난 500년 동안 개혁교회를 굳건히 지탱해온 진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칭의론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들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주장하는 핵심교리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로마서나 에베소서나 기타 여러 성경들을 공부하면서 모든 성경의 핵심이 이 이신칭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성경의 핵심진리를 비난하고 반박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 안에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들의 이익이나 챙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 때문에 그럴듯한 이론을 내세워서 이 진리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는 자들

 

  본문 46절에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지금 소아시아지방의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에 와서 전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유대인들이 있는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도 하나님을 먼저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던 구약성경의 핵심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스스로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누가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귀한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 한 것이 자기 자신들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두 가지가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런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많아서 이렇게 나라도 망하고 먼 이국  땅에 와서 비참한 삶을 사는데 무슨 하나님의 은혜까지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열심을 내어서 율법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선을 행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어찌 그냥 예수님이라는 분을 믿는다고 자신들 같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을 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사치와도 같은 것이었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들의 관심사였고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거절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무가치 한 것으로 여기고 거절하고 비난하고 반박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그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진리를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된다는 이 진리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따르지 않습니다.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자들

 

  본문 47-48절에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는 유대인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믿는 이방신은 나무나 돌이나 짐승이나 스스로 만든 하잘 것 없는 것들을 신으로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고 인간들에게 율법도 주시고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는데 유대인들이 자신들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이제 이방인들에게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받지 못했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자신들이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이방인들은 기뻐 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과 그 의로운 사람으로 받는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기뻐 뛰면서 당연히 그 믿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귀한 믿음과 영생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성경 구절구절을 통하여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왜 굳이 되지도 않는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귀한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신다고 하시는데 왜 그것을 거부하고 짧은 이 세상의 행복에 매달려서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엄청난 것을 주시는데도 그것을 거절하고 아주 작은 없어지고 썩어질 이 세상의 것만 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신의 주제를 알지 못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들이 이렇게 교만하고 어리석은 바보가 된 이유를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신칭의의 진리를 믿고 따르며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주지 않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믿지 못하는데 영생을 주시기로 하나님께서 작정을 한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여기 모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외형적으로 뭐 대단한 것이 있습니까? 여기 뭐 대단한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슨 혜택을 줍니까? 그냥 작은 외형적으로 별 볼일이 없을 것 같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특별한 사람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그 근거는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을 영생의 말씀을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찬송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