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12.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84)
  본문 : 행 13:49-52 
  제목 :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얻는 유익은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는 모습을 통해서 교회 본래의 모습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시작된 지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개혁한지 500년이 지났습니다. 이런 세월을 통해서 교회가 많은 부분이 변질이 되었고,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서 교회를 다시 한 번 개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교회가 시작될 때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시작이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신약교회의 본질을 바로 알아가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그리고 바울의 설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 교회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그들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이런 중요한 본질적인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다른 것들 보다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최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최고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후에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동원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했습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고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하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복음전파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49-50절 말씀에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그냥 ‘주의 말씀’이라고 했지만 다른 번역 성경들은 그 앞에 첨부된 단어를 해석하여 ‘이리하여’(공동번역), ‘이렇게 해서’(새번역), ‘그리하여’(현대인성경)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바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And the word of the Lord)”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지방에 두루 퍼진 주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런 수식어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조금 더 쉽게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라는 말의 의미는 ‘주의 말씀’이 앞에 기록된 말씀들과 연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계속해서 살펴본 사도바울의 설교 속에 나타난 성경의 핵심 즉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38절과 39절에 기록된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말합니다. ‘이 사람’ 즉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이 말씀을 그 주님의 말씀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성경의 핵심 말씀이 그 지방 전역에 전파 되었다면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받을 수 있다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기하고 비방하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영원한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기도 하고 자신들을 비하하여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거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더 적극적으로 바나바와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내버렸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지방에 사는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대부분 힘이 없고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오래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힘을 내서 복음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대적할 만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복음을 반대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한 인사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들이 잘 살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니까 힘없는 사람들이 나서서 싸우지 못하고 그냥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여기 경건한 귀부인이란 예배에 잘 참석하는 귀부인 하나님을 공경하는 귀부인을 말하는데 당시의 회당 예배에 잘 참석하는 귀부인들을 말합니다. 유력자들은 귀부인의 남편이거나 그 지역의 유력한 인사들로 권력도 있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를 한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이 뭘 잘 몰라서 믿지 않는다고 오히려 조롱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부인이고 또 경건하고 힘도 있는 유역 인사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면 그 영향력은 대단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절대적일 것이고 누구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교회 안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면 누가 사람 취급도 안하고 그들의 주장을 따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많이 배운 사람 돈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면 그 영향이 지대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우리 같은 작은 교회 목사들이 떠들어 봤자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지한 목사가 뭘 잘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라고 비웃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말씀인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핵심적은 복인데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복음의 진리보다 경건한 귀부인의 목소리가 유력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위력을 발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한 부류는 복음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극히 적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반대로 복음을 적극 수용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데 이들 역시 소수라고 했습니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거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칼빈이 이 중간층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신앙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그들이 불경건한 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냉랭하게 건성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장난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나 자신은 어디에 해당되는 사람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적극적으로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냥 대강 적당히 믿고 대강 적당히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하는 사람과 별 다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본문 51절에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는 행위는 다시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행위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 아주 악한 사람들과 절교를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런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4- 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각 성으로 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만약 너희를 영접하지도 않고 너희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성에서 나와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도 듣지도 않고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탄의 종이기 때문에 그들과 타협을 하거나 믿으라고 사정을 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정없이 단교를 선언하고 떠나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먼지를 떨라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 오염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단들이나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의 사상에 오염이 되어서 그들의 주장을 따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예 말을 섞지 말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오히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더 잘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다고 보니까 오히려 그들 주장에 말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설득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큰 교회를 이루고자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탄의 종들까지 교회에 끌어들이고 복음을 믿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던 시기에 미국교회는 부흥운동이 한참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영적 각성 운동이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숫자적인 부흥운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부흥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부흥운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는 교회의 부흥을 제일 큰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세우면 대형교회를 꿈꾸고 무엇을 하든지 무슨 목적이든지 사람만 많이 몰려오는 것을 부흥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흥을 목표로 내세운 주제들 중에 많은 부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반대되는 것들을 가지고 교회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회개운동이나, 바르게살기운동이나, 체험적인 신앙이나, 축복 받기를 원하는 신앙이나, 이런저런 신앙들이 사실은 복음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복음과 반대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만 많이 모을 수 있다면 다 사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외형적인 부흥을 위해서 이런 잘못된 것들과 손을 잡을 것이 아니라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결별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복음 진짜 믿음 진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본문 52절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기쁨이 충만하여서 떠날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쫓겨나는 신세인데 원통해하거나 억울해 하거나 슬퍼하면서 떠나야지 기쁨이 충만할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진짜 성경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를 잘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려오는데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부추겨서 박해를 하고 쫓아내는데 기쁨이 충만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은 그들의 기쁨 뒤에는 성령의 충만이 함께 하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볼 때 지금 상황은 기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통해서 바른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쁨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기록하여 인간들에게 전하는 일이며 그 성경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그 핵심을 바르게 전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받은 제자들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전한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예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즉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을 박해하는 유대인이나 경건한 귀부인들이나 유력자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데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더 잘하려고 노력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금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고 반항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고 자꾸자꾸 반복해서 믿음을 가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 분명해지면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구걸하듯이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우리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잘 출석하고 바른 믿음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전도하러 나갔는데 복음을 전하는 중에 여러 가지 이적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며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기를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이 보고를 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기뻐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증거는 우리가 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이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한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제일 큰 기쁨은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큰 기쁨은 복음을 바르게 믿다가 손해를 보고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선택받은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이런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동원해서 박해를 하고 쫓아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기뻐한 것은 복음이 바르게 전파되었기 때문이고 그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충성을 다함으로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