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86)
  본문 : 행 14:8-10 
  제목 : 구원 받을 만한 믿음.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사도행전 14장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과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 지방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중에서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가 생긴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스드라에는 아마 앞의 도시들처럼 유대인들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당이 아닌 사람들이 모일만한 어떤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여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 한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바울이 보니 그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서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한번 들어 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준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앉은뱅이를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고쳐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시면서 아주 의미가 있는 특별한 일들을 주로 기록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사도나 바울사도를 통해서 많은 표적들을 행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특별히 기록을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쳐준 사건은 베드로나 바울이 다 같은 사도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고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베드로가 행한 이적을 똑같이 행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같이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사도로 부르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3장의 사건과 14장의 사건은 여러 차이들이 있습니다. 똑 같은 사건들을 중복해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사건이 서로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같은 공통점과 서로 다른 차이점들을 살펴보면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반복하지 않고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앉은뱅이를 고쳐준 사건의 서로 같은 공통점과 서로 다른 차이점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8절 말씀에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있던 앉은뱅이와 루스드라에 있던 앉은뱅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태어날 때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고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들이 다 확실히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조금 다쳐서 발을 못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상태가 좋아서 걸어 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걷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걸을 수 있는데 힘이 좀 부족해서 잘 걷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났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람의 나이를 말하고 있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3장의 그 사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40세가 되도록 걸어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고쳐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용하다는 의사도 다 찾아가 보았을 것이고 좋다는 약들 좋다는 음식들도 다 먹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상태였고 작은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항상 이런 모습에서 시작을 하십니다.  그것이 병에서의 구원이든지 고통에서의 구원이든지 구원받을 대상은 항상 최악의 경우에서 시작을 하십니다. 날 때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걸을 수 없는 사람을 걷게 해주셨습니다. 아예 죽어버려서 소망이 없는 사람을 살려주셨습니다. 때로는 무덤에 묻혀 있는 사람을 다시 살려서 꺼내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와서 살다가 노예가 되어서 아주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이 누릴 최소한의 자유도 없었고 심지어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여야 하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비참함 속에서 깨닫고 하나님께 호소했을 때 그 최악의 상황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것도 그런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스스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죄악 된 습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죄를 짓지 않거나 용서받을만한 선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최악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우리의 능력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인류는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들을 해왔습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법이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법을 무수한 사람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좀 더 건강하게 사는 법을 연구해서 120년이나 요즘은 150년 정도 장수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하지만 영생은 포기한 상태입니다. 영생보다는 짧은 세상에서나마 더 행복하게 즐기면서 사는 방법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죽고 나면 그만인 세상사는 날까지 화끈하게 잘 살아나 보자고 외치면서 삽니다. 이런 절망에서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한 상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보면 어떻게 하면 나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불치의 환자들을 고쳐볼까 하고 연구를 합니다. 또 적극적으로 고치는 방법들을 잘 살펴보고 따라함으로 같은 능력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적으로 이런 표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소망이나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흉내를 내고 따라할 것을 아시고 그 방법들을 다양하게 하심으로 흉내를 낼 수 없게 하셨습니다. 각 상황에 따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때로는 아무런 믿음도 없는 사람에게, 때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때로는 그냥 큰 소리로 외쳐서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본문 9절 말씀에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구원이라고 쓴 헬라어는 소조(σώζω)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보통 죄 사함이나 영생으로의 구원이라는 말로 번역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고 할 때 이 소조(σώζω)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라고 할 때 구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단어는 ‘병을 고치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이라는 말보다는 병을 고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오늘 병을 고친 그 사람에게 병을 고칠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치유하다’, ‘낫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힐(heal)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는데 어떤 믿음인가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앉은뱅이에게서 보았던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본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본 것일까요?

 

  그 믿음이 있음을 보고 난 후에 병을 고쳐주었으니까 당연히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바울의 설교를 들었고 그로 인해 믿음이 생겼다고 했기 때문에 과연 바울이 병 낫는 것에 대한 설교를 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그 사람이 그런 설교를 듣고 믿음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이 병을 고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에 대한 보증으로 이런 표적의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의 병 나음을 통해 결국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확신을 가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병든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나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3장에서 똑 같은 환자를 낫게 해 주실 때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단순히 돈 몇 푼 얻기 위해서 베드로를 응시했을 뿐이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고쳐주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병을 고쳐주시는 표적을 보여 주실 때 어떤 때는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고 고쳐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그런 믿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는 목적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고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그런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믿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우리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믿음을 주실 때만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그 믿음이 나에게 있는 것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더러는 자신이 사실은 믿는 상태가 아닌데도 믿는 척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그런 엄청난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일에 최우선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희생과 헌신이 없는 믿음이란 진정한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목회를 좀 오래 하다가 보니까 사람들을 보고 그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주관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차원을 넘는 사랑이고 무조건의 사랑이기 때문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저런 어려움들 때문에 그 귀한 믿음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하실 것인가를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를 심판하시거나 우리를 구원하실 때, 제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조건이 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만 그 믿음은 우리 속에서 살아 있어서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회복시켜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내 속에서 나를 변화시켜서 나도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하나님께서도 나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도록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늘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나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에게 그 믿음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나에게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본문 10절에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라고 했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일어나 걸으라고 한다고 쉽게 일어설 수 있을까요? 많이 망설일 것입니다. 일어나려고 하다가 안 되면 넘어져 다치게 되니까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의심 없이 그 명령을 따라 일어섰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사도바울의 말 한마디만 믿고 일어섰습니다. 그 행동이 그에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야할 영원한 생명의 길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으로 가자고 하시면 예  하고 따라나설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아끼던 재물들, 이 세상에서 즐기던 그 모든 것보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더 사모하고 오늘이라고 하나님께서 가자고 하실 때 손을 내밀로 일어나서 갈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영원한 생명이 있는 영원한 천국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고 사모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을 최우선적으로 알고 그 믿음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처럼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없는 우리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죄에서 사망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나에게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