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4.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89)

  본문 : 행 14:19-22 

  제목 :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흔히 사도행전적인 교회라고 하면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님의 역사가 그대로 재현되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들이 일어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설교말씀을 들을 때도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도 하고 특별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그냥 듣는 것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문제는 성령님의 역사가 과거 초대교회처럼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나타나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방법을 통해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이 처음 선포되는 곳이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에 따라 초자연적인 표적의 은사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이미 전해진 교회에는 표적을 위한 초자연적인 은사는 자주 볼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초자연적인 역사가 늘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 늘 기적의 역사가 동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핍박과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돌에 맞아서 죽은 사람처럼 되고 질질 끌려서 성 밖에 내버려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이나 복음을 따라 사는 길은 기적이 일어나고 늘 승리하고 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오히려 환난을 당하고 죽을 고비도 넘겨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본문 19절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라고 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와서 무리들을 충동했다고 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은 바울과 바나바가 앞서서 전도를 했던 도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복음을 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쫓아와서 죽이려고 합니다.

 

  안디옥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어 놓고 그 뜻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을 때 바울이 아브라함 때의 이야기부터 모세 때와 다윗왕 때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의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 모든 구약 성경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는 것임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특별히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의회당에 들어가서 안디옥의 회당에서와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서도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말씀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교회가 시작이 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탄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바르게 사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 사탄의 사주를 받아서 복음전도를 방해하는 중심에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도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해서 악감을 품게 하고 두 사도를 모욕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들어서 두 사도가 도망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루스드라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도 유대인들은 무리들을 충동합니다. 무슨 말로 무리들을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곳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고하 바나바를 반대하게 만듭니다.

 

  루스드라는 표적이 일어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를 걷게 해 준 곳입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바나바와 바울을 그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헤르메스신이라고 하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곳입니다.

 

  그런 표적까지 본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하루아침에 변해서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하고 이번에는 아예 돌로 쳐서 바울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죽은 줄 알고 바울을 질질 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뭘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된 소식을 전하여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었는데 고맙다고 보상은 하지 못할망정 돌로 쳐 죽일 것까지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탄의 세력이 유대인을 충동하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충동해서 이런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복음전파를 방해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일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일만큼은 방해를 하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탄이 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사탄을 따르는 것이 되고 맙니다.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계략에 넘어간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사탄은 거짓선생들을 교회에 침투시켜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게 만듭니다.

 

  착하게 살자 좋은 일 많이 하자 이 세상에서 복 받고 행복하게 살자 이런 말로 사람들을 유혹해서 십자가의 복음에 다른 복음을 섞어서 십자가의 복음보다 이 세상의 복음을 더 좋아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외면하여 죄에서 구원을 받는 일을 소홀히 여기게 만들어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환란을 당합니다. 무식한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고 보수골통이라고 비웃음을 받습니다. 성경을 연구했다는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는 목회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시하고 비웃으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내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들이 잘 못됐다고 하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믿고 있던 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신을 섬기는 방법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자기들이 무식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자기들이 엉뚱한 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자기들이 인생을 헛살고 잘못 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새 언약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내하고 대적을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합니다.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본문 20-21절 상반절에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그들에게 충동을 받은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여서 성 밖에 내쳤는데 제자들이 바울의 시체를 둘러서 있을 때에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털털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런 다음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서 죽게 까지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야 하는 일인데 빨리 도망을 가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니까 성으로 도로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나 안 죽었다고 자랑하려고 갔을까요? 죽이려면 다시 죽여 보라고 큰소리치러 갔을까요? 아마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또 다른 도시로 향합니다. 가는 곳 마다 박해를 받았고 또 이번에 가는 도시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른 도시로 가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또 박해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더베라는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지만은 그곳에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또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세우시고 존속시키시는 이유는 여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특별한 백성이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습니다. 그 특별한 백성들이 많은 곳도 있고 적은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교회가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든지 적은 사람들이 오든지 그곳에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적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을 다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에 온 우리들이 우리들의 힘으로 교회를 지켜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본문 21-22절에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더베에서 복음을 전한 바나바와 바울이 다시 전에 복음을 전했던 도시로 들어갑니다.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던 도시로 다시 돌아간 것은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세상에서 많은 환란을 당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반대하고 핍박하고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던 도시들을 다시 들어간 것은 그들을 반대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곳에는 예수님을 믿고 신랑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러고 나서 많은 박해와 환란을 당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하고 당국에 고발을 하고 못살게 굴었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서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그 도시들을 다시 방문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가를 다시 한 번 설명을 하고 이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고생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이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런 환란을 당하면서 믿음을 지킨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5-38) 

 

  그들이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환란을 당했습니다. 심한 고문,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 돌에 맞아서, 톱으로 겨져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광야나 산이나 동굴에 숨어살면서 헐벗고 굶주림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평안하게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이것이 믿는 것이고 이런 믿음으로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평안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죽인다고 달려들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희생을 좀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거나 살 곳이 없어서 노숙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평화의 시대에서 쉽게 예수님을 믿고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 마음속에 늘 이 말씀을 기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는 말씀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믿음을 지키기가 힘든 세상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핍박이나 박해가 아니라 많은 유혹들이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작전을 바꿔서 우리에게 힘으로 핍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유혹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탄의 사주를 받은 거짓선생들이 교회에 많이 침투해 있어서 우리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 이 좋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 죄 사함이니 천국이니 이런 말에 넘어가지 말고 이 땅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라. 이런 유혹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참된 믿음을 지키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는데 우리만 이 복음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당하는 환란입니다. 이 참된 복음을 선포하고 이 참된 믿음을 지키는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가 당하는 환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이 귀한 믿음 이 위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이 믿음위에 머물러 있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나라에 이르기 까지는 많은 환란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각오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희생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 믿음만은 꼭 붙들고 지키며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