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8.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61)
  본문 : 행 12:11-17 
  제목 :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2장에 들어와서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하고 베드로가 잡혀가서 순교직전에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탈출하게 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탈옥해 나온 베드로가 교회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자신을 이끌어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큰 그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의 예언대로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고 진행해 나가신다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동원해서 각각의 형편대로 어떤 사람은 순교로 어떤 사람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보통은 자연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진행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통해서 깨달을 것은 세상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끝까지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 각 사람이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할 때 초자연적인 방법을 보고 따라가려고 흉내를 내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처한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본문 11, 12절 말씀에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감옥을 탈출하여 나오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얼떨결에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서 감옥을 나오기는 했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웁니다. 베드로 일어나면 지키는 간수가 자동으로 알 수 있도록 양손을 쇠사슬로 양 옆에 누운 간수의 손과 같이 묶어 놓았는데 손에 채워졌던 그 쇠사슬이 스스로 풀려버렸습니다.

 

  띠를 띠라, 신을 신으라, 겉옷을 입으라는 천사의 말대로 따라했습니다. 밖으로 나오는데 간수가 지키는 두 초소를 그냥 통과하게 되고 또 마지막 철문도 자동으로 그냥 열려서 나오기는 했는데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천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감옥을 나와서 한 거리쯤 지날 때 천사가 떠났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이나 환상이 아니고 분명 현실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꿈을 꾼 것도 아니고 환상을 본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뭘 보여주시는 것도 경험을 했던 베드로사도입니다. 11장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사도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일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에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내려 보내시고 베드로사도에게 잡아먹으라고 하시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런 환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님께서 이 사건을 기록하시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야 참으로”라는 말씀과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꿈도 아니고 환상을 본 것도 아니고 실지로 일어난 일이다라고만 하여도 될 것인데 이제야 참으로 알았고 깨닫게 되었다고 강조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이 일이 주께서 천사를 보내서 하신 일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있다고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 이야기를 보아도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멀리 도망을 하려고 할 때에 거기에 마침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가 와 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일이 잘 풀려진다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해서 바로 앞에서 여러 가지 이적들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렸지만 애굽의 술객들도 몇 가지는 똑같이 따라 했습니다.

 

  때로는 사탄도 기적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접근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그냥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특별한 일들을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깊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 어려운 문제가 잘 해결이 되었다고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순교를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 속에 고난 속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순교를 통해서도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도 하십니다.

 

  베드로사도가 감옥에 붙잡혀 가면서 이미 야고보사도가 순교를 당한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도 야고보사도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자신이 이렇게 감옥을 빠져나온 것이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그가 깨달은 것이 주께서 천사를 통하여 이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특별히 하신 일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헤롯의 손과 유대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일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헤롯의 손이란 헤롯이 가진 권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헤롯왕이 가진 권력이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다 잡아 죽여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당시의 예수님 믿는 사람이란 정말로 힘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소수의 집단이었습니다. 뭐라고 항의 한번 하지 못하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교회이고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헤롯이지만 하나님을 이기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사탄의 앞잡이로 악역을 담당하였을 뿐이지 그도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12장 말미에 가서 보게 될 것이지만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헤롯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벌레 하나 이기지 못하고 벌레에 먹혀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도 세상의 권력은 막강합니다. 우리가 세상권력과 대항하지 않으니까 잘 모르지만 이 세상권력과 대항하여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세상 권력에 이끌려 다니며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권세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권세도 결국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흥하고 망하는 권세이고 우리 하나님나라를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이 일에 조금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사도가 감옥을 나와서 깨닫게 된 것이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었다고 했는데 그 모든 기대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유대인의 기대란 유대인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나라를 로마의 학정에서 구원해서 나라를 회복하고 이 세상의 가난에서 고통에서 구원해줄 메시야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고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반대했습니다. 사사건건 방해를 합니다. 메시야로 오셨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죽여서 교회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끝까지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방해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굴복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대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일에 악역을 맡은 일이고 그들에게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임으로서 그들의 기대를 이루어간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난을 통하여 복음이 세계만방에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이 복음을 반대하여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일에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고 자신들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본문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감옥을 탈출하여 그들이 모인 교회 앞에 왔을 때 거기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교회 앞에 와서 문을 두드렸더니 거기 모인 사람들이 놀래서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니까 로데라고 하는 여자이이가 나와서 문을 두드리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듣고 베드로라고 생각하고 너무 기뻐서 미처 문도 열어주지 못하고 안으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베드로사도가 왔다고 전하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믿지 않고 네가 미쳤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사도가 분명하다고 하니까 베드로사도가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천사가 왔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따로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집이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지금 모여서 기도하는 기도제목은 베드로의 석방이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야고보사도와 베드로사도가 잡혀가서 야고보사도는 이미 순교를 당했고 베드로사도도 순교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사도만큼이라도 살아서 나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응답을 받아서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살아서 나왔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믿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왕명에 의하여 잡혀가서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감옥을 빠져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탈옥을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나타났다고 했을 때 거기 있던 성도들이 베드로의 천사가 왔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각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큰 무리들에게 한 천사를 보내기도 하셨고(출 14:19), 때로는 한 사람에게 많은 부리의 천사를 보내기도 하셨습니다(왕하 6:19).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미신이며 칼빈의 말대로 “우리는 모든 천군천사들은 교회의 안전을 지켜주는 존재들이고, 필요에 따라서 그 때마다 한 천사나 많은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늘 우리를 돌보시며 어려울 때 도움을 주시는 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감옥을 나와서 교회의 성도들을 만나 베드로사도의 행동입니다. 성도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다른 곳에 있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말한 야고보는 앞에서 순교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미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를 위시한 믿음의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사실을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려고 하지는 않았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하신 이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성도들을 특별히 도우심을 알리는 것이 유익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심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감옥에서 구원해 주셨다고 왕 앞에 가서 날 잡아보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 바로 잡혀가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다가 복음을 놓쳐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옥에서 탈출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순교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어떻게 바르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괜한 일에 신경을 쓰다가 아주 중요한 핵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 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 이런 일에 논쟁을 하면 안 됩니다. 세상적인 복은 받는 사람도 있고 못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이런 일에 논쟁을 하면 안 됩니다. 기적적인 경험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 기적적인 일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지는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가가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말씀을 보면서 것으로 알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고 없애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복음의 위대함을 알고 복음전파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