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30.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69)
  본문 : 행 13:17-19 
  제목 : 하나님이 우리 조상을 택하시고.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서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적폐청산”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적폐(積弊)라는 말은 오랫동안 쌓인 잘못된 것이나 옳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옳지 못하고 잘못된 것들이 있는데도 오랫동안 고치지 못하고 쌓여 있는 것을 청산하자는 것입니다. 잘못되어 있는 것 그것도 오랫동안 쌓여 있는 잘못된 것을 청산하고 새롭게 바르게 하자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잘못된 것을 고칠수록 좋고 새롭게 바르게 하자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폐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실행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니까 그것이 나쁜 것이고 적폐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마다 의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고 사람마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서로 다를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유행하는 말이 ‘내로남불’이라는 말입니다.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데 내가하는 일은 옳은 일이고 같은 일이라도 남이 하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도 적폐청산과 같은 시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에는 바르게 시작을 했는데 세월이 흐르다가 보면 잘못된 일들이 생기고  그것이 고쳐지지 않아서 아주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런 오래된 잘못들을 고치려고 하는 일들이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시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잘못된 것을 정하고 고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학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자유나 행복을 중심으로 의와 불의를 구분하려고 합니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사람의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잘못된 것으로 간주를 합니다. 인간의 생각에 맞추어서 성경도 고치고 하나님의 뜻도 바꾸려고 합니다.
  
  반대로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의와 불의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이면 그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원래의 뜻을 끝까지 지키고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때로는 보수주의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속한 고신교단은 개혁주의 혹은 보수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단입니다. 저 역시 그런 신학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애를 쓰고 거기서 잘못된 것은 고쳐서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설교를 적폐청산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에 대해서 오랫동안 잘못알고 있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성경을 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살았지만 잘못된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원래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청산하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17절에서 19절까지 읽었지만 오늘은 17절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조상을 택하시고”라는 말씀을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조상을 택하시고
   
  본문 1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들의 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조상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위대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조상을 통해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잊어버린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훌륭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받을 수 있는 그 귀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시작할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선택하실 때 엄청난 사람을 선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을 아주 위대한 인물이요 자랑스러운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훌륭하고 착하고 능력이 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서 팔던 데라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처음부터 경건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큰 민족을 이룰 조상으로 부르셨다면 아들을 잘 낳는 사람으로 선택을 하셔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75세였는데 그때까지 자식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 아내는 아브라함이 100세가 될 때 겨우 이삭이라는 아들 한 명만 낳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아도 특별하게 칭찬을 받을만하게 잘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믿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양아들도 삼아보려고 하고 첩을 얻어서 아들을 낳기도 한 것을 보면 믿음도 없고 순종도 안하는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인간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을 특별한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축복의 핵심도 모르고 그냥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만 자랑하고 자부심을 갖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복되고 왜 아브라함의 후손이 복이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진정한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도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여 하시지만 그 구원을 받을 사람도 특별히 선택을 하시고 그 선택받은 사람만 구원을 얻도록 하십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된 것은 정말로 알고 보면 엄청난 복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교회들이 많고 교회에 성도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특별히 복음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천에 한 사람 만에 한 사람 있을까말까 한 아주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하심도 작은 일의 선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찬국 백성이 되는 일에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도 부족하고 순종도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약속을 해주시지만 그 약속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다든지 많은 돈을 들여서 그 권리를 샀다든지 하면 귀하게 여길 것인데 그런 저런 것도 없이 그냥 은혜로 거저 받아서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능력으로 우리의 자격을 받았다면 오히려 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물로 이 귀한 것을 받을 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도 그때그때 하는 것을 보면서 심판을 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진짜 믿음을 가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면서 꾸준히 훈련을 시키신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처럼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그때그때 평가하신다면 우리 가운데서도 불합격 받아서 퇴출당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심을 후회하시거나 취소하시지 않고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도록 훈련시켜서 꼭 합격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믿음의 훈련을 잘 받으셔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릅니다. 외형적으로 건물이 큰 것을 자랑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면서 정작 정말로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른다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조상을 자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임을 자랑하면서 왜 그것이 자랑스러운지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 성도가 교회를 자랑하고 교회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정작 교회의 성도를 위대하게 하는 복음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17절 하반 절에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결정적인 불순종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도 주시고 그 언약을 행할 장소도 주셨는데 그 장소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고 슬금슬금 애굽으로 내려가기 시작을 하더니 결국은 애굽으로 이주를 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이 자꾸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이유는 가나안 땅보다 애굽 땅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땅이 아주 좋은 땅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비가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이라는 나라는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해서 물이 풍족하여서 비가 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비가 조금 오지 않으면 자꾸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라고 하셨으면 설마 굶어죽게야 하겠습니까? 주여 하고 기도하면 비를 내려주시든지 다른 먹을 것을 주시든지 하실 것인데 믿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이야 가물어서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 같지가 않지만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친히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에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다 해결이 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기 싫은 것입니다. 기도를 그냥하면 됩니까? 기도를 할 수 있는 떳떳한 상태여야 하는데 만날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없으니까 기도할 때만다 잘못된 것 회개해야 하고 똑바로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하니까 그런 어려운 기도생활 하지 않고 살아보자고 애굽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잘 풀려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살기가 더 어렵습니다. 늘 기도하지 않으면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꾸 애굽땅을 바라보고 삽니다. 애굽에만 가면 이렇게 애 터지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라고 사정하지 않아도 되고 또 가끔은 죄도 지으면서 살아도 되니까 애굽으로 가고 싶어서 쳐다보고 사는 것입니다.

 

  가끔은 로또복권이라도 사서 당선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 10억쯤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하는 가나안 땅의 생활처럼 좀 어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특별히 도와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삶보다 더 쉽고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못살 것 같지만 세상의 재물이나 좋은 환경보다도 더 좋고 편안하고 쉬운 것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어려워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면 도움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기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은 멸망의 길이고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믿음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미련하지만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척박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지만 이 길 끝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